■ 광해 8편
■ 광해 8편
광해군은 유배기간 중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 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 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移配:귀양지를 옮김)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으며, 이 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上房)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는 긴 세월 동안 언젠가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년 귀양생활 18년 수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방손(傍孫:방계혈족) 이해성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 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양주 적성동에 있는 그의 어머니 공빈 김씨 무덤 아래 묻혔다. 조정에서 베풀어 준 마지막 은총인 셈이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광해. 15년 세자 생활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훌륭한 임금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결국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하고 폭군의 오명을 쓰고 폐위에까지 이르렀으니, 비운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은 인간적인 약점도 많이 지니고 있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고 세자자리에 올랐으나 선조의 질투와 변덕으로 기댈 언덕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많은 왕자들(선조는 영창대군 외에도 13왕자를 두었음) 틈에 끼어 왕위가 늘 불안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늘 외롭고 불안한 그의 처지는 정서불안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음모 술수가 판을 치는 궁중을 현명하고 유연하게 다스리지 못한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 9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