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해 9편
■ 광해 9편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라는 ‘원죄’ 때문에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 등에 남아있는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광해군은 조선의 다른 왕들과 달리 연산군과 함께 ‘조(祖)’와 ‘종(宗)’으로 칭해지는 묘호(廟號:임금의 시호)마저 부여받지 못한 채 ‘군(君)’이라는 왕자 시절의 호칭으로 남아 있다. 그의 묘도 ‘릉’이라고 칭해지는 다른 왕들의 무덤과는 달리 ‘광해군묘’로 지칭된다. 연산군이야 검증된 폭군이므로 그리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광해군의 경우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존재하는 왕이므로 연산군과 같은 위치의 폭군으로 취급되는 점은 분명 억울할 수 있다. 이런 인식 때문에 최근에는 광해군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광해군이 왕통 강화를 위해 무리수를 둔 점은 분명하지만, 내정 개혁이나 외교 부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구습을 타파하고 피폐된 국토를 재건하기 위해 내정을 충실히 했으며,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하려 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개혁과 혁신을 위해 치도(治道)의 이론을 제공한 인물은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를 물러가게 하고, 우리의 군사로 우리의 강토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패한 관리들을 매섭게 처단했으며, 후금과의 관계에서도 중립적이고 실리적인 태도를 건의했다.
광해군은 정인홍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혁신정치를 폈지만, 이런 과정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에 덕치(德治)를 벗어나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간신인 이이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 일을 그르친 경우도 있었다. 반정(反正)이후 서인 주도의 모든 기록들은 온갖 잔일을 들추어 광해군을 헐뜯었고, 심지어 인목대비는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광해군을 받들던 대북파가 몰락하여 그를 옹호할 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과도 비슷한 상황에서 광해군이 보여준 유연하고 능동적인 실리외교는 당시 조선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탁월한 외교 정책이었고, 전후 복구 사업은 오랜 전란 후유증으로 살기 힘들었던 조선 백성들에게 유효적절한 민생안정정책이었다. 만약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더라면 후금과의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우리나라는 안정적인 발전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백성의 삶도 더 편안하지 않았을까? 과연 광해군은 짐승의 탈을 쓴 패륜아에 불과한 것일까?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파악하여 현실적으로 적절히 대처하려 했던 명군주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국가나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당쟁(黨爭)만을 일삼던 그 시대가 만든 비운의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 여러 가지 뼈아픈 아쉬움이 남는다.
광해군부부의 무덤은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낮은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왕릉답지 않게 규모가 초라하기 짝이 없고, 비석에는 총탄 자국도 군데군데 있어서 보는 이들을 서글프게 한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