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과 과거제도 4편
■ 교육과 과거제도 4편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의 평균 연령을 보면 생원·진사시는 34.5세, 문과는 36.4세로 모두 서른다섯 전후였다. 조선시대에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일찍 자식을 본 사람이라면 자식 결혼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이다. 게다가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합격자의 연령도 높아져 18세기 후반 문과급제자의 평균 연령은 39.0세나 되었다. 자식을 결혼시키고 손자를 품에 안을 수도 있는 나이였다. 그나마 30대 합격은 준수한 편이었다. 조선시대 문과급제자의 합격 연령을 보면 40대 이상의 급제자가 전체의 약 40퍼센트를 차지했으며, 극히 드물게는 70대와 80대 급제자도 있었다. 최고령 합격자는 1861년(철종 12년)의 김재봉(金在琫)과 1888년(고종 25년)의 박화규(朴和圭)로 모두 90세였다. 두 사람은 구십의 노인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급제를 하사받았다. 놀라운 것은 이 나이까지도 과거급제의 꿈을 안고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년의 아버지와 중년의 아들이 함께 과거를 치르는 일은 오히려 흔한 풍경이었다.
과거에 합격한 이는 전체 응시자의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청년 시절부터 연례행사처럼 과거시험장에 출입했으나 끝내 합격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에게 과거는 평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았다. 이제는 아들과 손자가 그를 대신하여 과거시험장을 드나들었다. 그 꿈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할지라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자질과 실력이 이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신뿐 아니라 조상과 후손들을 생각하며 과거급제를 위해 노력하는 일은 숙명처럼 주어진 일생의 과업이었다. 그리고 이 과업은 자자손손 대물림되었다. 과거 응시는 남성이 감당해야 하는 일이지만 과거급제는 온 집안의 꿈이었다. 더욱이 수십 년에 걸쳐 남편과 자식의 과거 응시를 지켜보는 여성에게는 과거 응시가 자신의 일상이며, 과거급제가 자신의 꿈이기도 했다.
남편은 신혼 초부터 과거를 준비하느라 오랫동안 집을 비웠다. 또 시험 때마다 짧으면 열흘, 길게는 달포가 걸리는 여행길에 올랐다. 이런 일은 거의 매년 반복되었다. 남편과 자식을 과거시험장으로 보낸 여성은 매일 새벽 정한수를 떠놓고 합격과 무사 귀환을 빌었을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메고 한양으로 향하는 선비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과거시험을 보는 것이 자기 개인과 가문에 영광을 주는 지름길이라 생각해서 당시에는 과거를 보러 가는 것을 ‘영광을 보러 간다.’라는 뜻으로 ‘관광(觀光)’이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멀고도 험한 길을 떠나는 과거 길을 뜻하는 ‘관광’이 오늘날에는 여행을 한다는 의미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