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과 과거제도 6편
■ 교육과 과거제도 6편
3년에 33명만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대단히 좁은 문이다. 평생을 걸고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공부에 매진해야만 했다. 매년 보는 시험도 아니고 합격자 수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양반가문에서는 양반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과거에 응시해야 했다. 그래서 결국 특별시험에서 기회를 더 얻어야만 했다. 심지어 정약용도 후손들에게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때 그때 행해지는 특별시험에 신속히 응하기 위해서였다.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들은 사조단자(四祖單子)를 제출해야 하는데, 사조단자는 친가와 처가의 증조부, 조부, 부친, 외조부의 명단과 이력을 말한다. 양인과 서얼을 가려낼 수 있는 사조단자를 통해서 양반들은 과거시험에서 우의를 확보했다.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유생들은 길을 떠나기 위하여 행장을 꾸린다. 과거시험장까지 먼 길을 가고, 또 장기간 외지에서 체류해야 했던 만큼 짐도 많을 수밖에 없다. 영조때 황윤석(黃胤錫)이 상경할 때 가지고 간 물건을 보면 옷이나 세면용품, 의약품처럼 오늘날에도 가져갈 법한 물품들이 있는데, 그 종류는 훨씬 더 많았다. 그중에는 이불과 베개, 자리도 있다. 상대적으로 서비스업이 덜 발달한 시절에 집을 나설 때는 더 많은 물품을 지고 가야만 했다. 그래서 양반들의 여행길에는 늘 짐을 질 노비가 동행했다. 과거를 보러 갈 여비를 마련할 수 없는 집안에서는 과거를 포기해야하는 일도 생겼다.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빠뜨리면 안 되는 물건이 붓, 벼루, 먹과 같은 문방구다. 그러나 여행에 가져가는 물품인 만큼 지나치게 크거나 무거우면 곤란했다. 여행 중에 가져가는 벼루를 ‘행연(行硯)’, 붓을 ‘금낭필(錦囊筆)’이라고 한다다. ‘행연’은 여행용 벼루라는 뜻으로 보통의 벼루에 비해 크기가 작기 때문에 ‘소연(小硯)’이라고도 했다. 보통의 벼루가 작게는 10센티미터, 크게는 20센티미터인 것에 비하여, 행연은 대개 10센티미터 이하였다. 또 보통의 벼루에는 화려한 문양을 새겨 넣었지만, 행연은 아무런 장식 없이 단순한 형태로 무게와 크기를 줄였다. 여행 중에 사용해야 하는 만큼 실용적인 목적에서 작고 단순한 형태의 벼루를 선호한 것이다.
‘금낭필’은 금낭(錦囊), 곧 비단 주머니에 넣는 붓을 의미한다. 여행 중이라도 붓은 용도에 따라 여러 자루가 필요했다. 여러 자루의 붓을 요령 있게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 필낭(筆囊)으로, 여러 자루의 붓을 넣고 말아서 끈으로 묶도록 되어 있었다. 오늘날의 필통인 셈이다. 현전하는 유물을 보면 휴대용 문방구함도 있다. 나무로 짜인 상자 안에 붓, 벼루, 먹, 연적 등을 넣는 자리가 만들어져 있고, 종이를 넣을 수 있는 작은 서랍도 있다. 이런 물건은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던 행연이나 필낭에 비하면 훨씬 더 고급스러운 것으로 아무래도 좀 더 부유한 층에서 사용했을 듯하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