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육과 과거제도 7편
■ 교육과 과거제도 7편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꼭 가져가야 했던 물건은 시험 답안을 작성할 시지(試紙)였다. 오늘날은 시험장에서 답안지를 나누어주는 것과 달리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는 응시자인 유생들이 직접 답안지를 장만해서 가져가야 했다. 유생들은 이왕이면 고급스럽고 큰 종이를 준비하려 했기에 조정에서는 종이의 지질과 규격을 정하고 이를 벗어나면 시험에 응시할 수 없도록 했다. 규격은 시험마다 달랐다. 시지를 장만하면 먼저 오른쪽에 응시하는 유생과 사조(四祖,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나 부친의 인적 사항을 기재했다. 이때 응시자들은 합격의 기원을 담아 먼저 급제한 사람들에게 이를 대신 써주기를 청했다고 하는데, 글씨를 써주는 이를 ‘복수(福手:복손)’이라 불렀다고 한다.
응시자들은 정성스럽게 마련한 시지를 들고 잔뜩 긴장한 채 과거시험장에 들어갔다. 시험 문제가 내걸리면 재빨리 답안의 내용을 구상하지만 주어진 제목에 맞춰 좋은 내용을 구성하는 것도, 좋은 글귀를 생각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많은 유생은 제출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답안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답안을 제출한 유생들은 무사히 시험을 치렀다는 안도감과 합격에 대한 기대 및 불안 속에서 과거시험장을 빠져나갔다.
시험이 끝나면 채점을 하는 시관(試官)들이 바빠졌다. 시관들은 먼저 제출된 답안을 열 장씩 묶어 축을 만들고, 천자문으로 순서를 매겼다. 그리고 같은 축 내에서 다시 순서를 매겼다. 답안 정리가 끝나면 시관들이 채점을 시작한다. 문제마다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 차상(次上), 차중(次中), 차하(次下), 갱(更), 외(外) 등으로 성적을 매겼다. 식년시·증광시·별시 문과는 채점을 더 엄격히 하기 위해 사본을 작성해서 채점했는데, 사본에는 성적을 기재하고 원본에는 ‘일지일(一之一)’과 같은 형식으로 등수를 기재했다. 과거의 등수는 1등 몇 명, 2등 몇 명, 3등 몇 명으로 나뉘며, 같은 등수 안에서 다시 등위를 매겼다. ‘일지일’은 1등 가운데 첫 번째라는 뜻으로 곧 장원이라는 의미다.
최종 단계의 시험인 문과 전시나 생원·진사시 회시 때는 합격 답안에 각각 붉은색과 노란색의 종이를 붙여 시험 종류와 등수를 기재하고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첨지(籤紙)에는 ‘무오식년문과병과제십육인망(戊午式年文科丙科第十六人望)’과 같은 글귀를 적었다. 무오년의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제16등 합격자 후보라는 뜻이다. 맨 뒤에 ‘망(望)’이라고 쓴 것은 국왕에게 후보로 추천한다는 의미였다. 채점이 끝나고 합격자가 결정되면 방(榜)을 내어 이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합격자에게는 답안지를 돌려주었다. 낙방한 답안지는 시관이나 각 관서에 나누어주어 재활용하도록 했다.
문무과와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는 국왕의 도장을 찍어 주었으나, 잡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을 찍어 주었다. 이는 문무과, 생원·진사시보다 잡과가 경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