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1편
■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1편
16세기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의 걸출한 학자들이 많이 등장했다.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율곡 이이(李珥), 성리학의 태두 퇴계 이황(李滉), 실천적 성리학자 남명 조식(曺植), 실학의 선구자 토정 이지함(李之菡) 등이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로서 쌍벽을 이룬 이황과 이이는 학문뿐만 아니라 훗날 두 사람의 학문을 이어받은 제자들이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라는 조선의 대표적 학자 집단을 이루었다는 점에서도 한국철학사에 차지하는 무게는 아주 크다. 율곡 이이의 학풍은 일상 속의 도리(道理) 즉 실천을 중요시 하는 것인데, 한마디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선생을 합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이는 중종31년 강원도 강릉에 있는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법을 담당하는 사헌부 감찰 벼슬을 지내는 이원수였고, 이이만큼이나 유명한 그의 어머니는 오늘날 한국 어머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신사임당이다. 경포대 근처에 있는 신사임당의 친정집 즉 이이의 외가는 검은 대나무가 자란다고 해서 오죽헌(烏竹軒)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그 곳에 가면 검은 대나무를 볼 수 있다. 동해 바다에 사는 용이 아기를 안고 집으로 들어와 사임당의 품에 안겨 주는 꿈을 꾸고서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이이가 태어났던 방에는 몽룡실(夢龍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용’이라는 뜻으로 현룡(見龍)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팔기 위한 물건을 만들거나 장사를 할 수 없었다. 선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공부뿐이었으므로, 가난한 선비는 집안을 돌보기가 어려워서 처가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이도 아버지가 처가의 신세를 지는 덕에 외가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고, 자신 역시 훗날 처가인 경기도 파주 밤골 마을에서 여러 해를 살았다. 처가 동네인 밤골 마을은 이름처럼 밤나무가 많았으며, 이이의 호인 율곡(栗谷)도 바로 그 밤골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율곡 이이가 훗날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 사임당의 교육에서 온 영향이 컸다. 사임당의 인품과 예술적 재능을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는 아주 많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유가경전에 밝고, 글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던 사임당은 이이가 16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삶의 회의와 상실감을 크게 느낀 이이는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侍墓)하였다. 시묘생활이 끝나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1555년 20세 때 하산해 고향으로 돌아와 줄곧 오죽헌에 머물면서 다시 유학에 전념하였다. 그래서 다른 성리학자들과 달리 이이의 사상(思想)에는 불교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