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3편
■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3편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림들이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出仕)를 포기하고 지방에 머물며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명종 20년)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림들의 신원(伸冤:원통한 일을 품)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이는 1564년 29세 때부터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68년(선조 1년)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국방대책인 시무 6조를 선조에게 올렸고, 경연에서 십만양병설 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십만양병설 을 주장했다고 하는 것은 《선조실록》에는 기록이 없고, 김장생의 문집에만 실려 있는 내용이므로 그 진위여부가 모호하다. 아무튼 선조가 율곡(栗谷)이 건의한 시무6조를 제대로 수용했더라면 임진왜란의 참혹한 전화(戰火)는 피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년)까지의 약 30년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해 일대 개혁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오랫동안 도학(道學)이 행해지지 않아 폐단이 쌓여 있으므로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폐단이란 공물납부와 진상의 폐해, 군역의 불균등, 관리들의 부정 등을 말한다. 이에 그는 공물납부를 공평하게 하고 진상(進上)을 경감할 것을 주장했으며, 나아가 잡다한 일체의 공물을 폐기하고 전답의 면적에 따라 쌀을 징수하는 수결수미법(隨結收米法)을 전국에 시행할 것을 제안했다. 호조의 관리로 하여금 역(役)을 피한 숫자를 조사·색출하여 이들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한편, 변방의 장수들이 군졸들을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을 그 지방의 창고곡식으로 보장해주는 방안과 군졸들이 휴식할 수 있도록 병역교대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파산상태에 빠져 있는 국가재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것과 관료기구를 간소화하고 낭비를 근절하여 국가재산의 손실을 방지할 것을 제안했다. 이이는 이러한 개혁은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실현될 수 있으며, 그 실현여부는 군주의 개혁 의지(意志)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현명한 신하가 있는가 없는가에 달렸다고 여겼다. 이러한 이유로 이이는 ‘성학(聖學)의 이름으로 군주를 교도하여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군주개조론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