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6편
■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6편
이이는 이러한 반대에도 무릅쓰고 “만일 두 사람이 조정에 있으면 말썽이 그치지 않을 것이니 반드시 외직을 보내어서 뿌리를 끊어야 합니다.”하며 이전부터의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였다. 이날 논의는 대체로 외직으로 보내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었으나, 결국 이이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외직으로 보낼 것이 결정되었다. 얼마 후 선조는 특명으로 김효원은 경흥부사에, 심의겸은 개성유수에 제수하였다. 이런 조치는 병까지 앓고 있는 김효원에게 매우 불리한 제수였다. 처음에는 양자 간을 조정하려는 이이의 제안이 결국에는 양자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이이로서도 대단히 곤욕스러웠다. 사림을 조정하고 정국을 안정시키려고 제안했던 것이 오히려 편파적인 인사가 되면서 불만을 가져오고 오히려 조정을 더 어수선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이에 대한 책임을 느낀 이이는 다시 선조에게 건의하여 김효원은 삼척부사에, 심의겸은 전주부윤에 고쳐서 제수하였다.
이러한 이이의 중재책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이에게, “천하에 둘 다 옳고 둘 다 그른 것이 없소. 공의 이번 처사가 시비를 알지 못하고 둘 다 온전히 하려고만 하니 인심이 불만스럽게 여기오.” 하며 질책하였다. 그럴 때마다 이이는 답했다.
“두 사람의 일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사이의 알력으로 조정이 불안하기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둘 다 그르다. 비록 둘 다 그르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같은 선비이니 다만 화해하고 융합시키면 될 것이다.”
그 유명한 율곡 이이의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이다. 그렇게 이이는 양측에서 공격을 받았다. 선배 사림들은 이이가 김효원을 물리치지 않는다고, 후배 사림들은 이이가 김효원을 쓰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차로 율곡 이이는 서인 측으로 기울게 되면서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이이는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죽었다.
서인에 속했던 이이(李珥)는 편당을 들지 않고 화해에 힘을 기울였으나, 그의 성격 자체가 원만치 못하여 남을 포용하기 어려웠으므로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이(李珥)는 학자이자 청렴한 정치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그의 후학들인 김장생, 조헌, 이귀, 황신 등은 조선후기 정치 사상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84년 서울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하여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풍덕의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개 서원에 배향(配享:신주를 모심)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