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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5일 금요일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7편

■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7편

■ 구도장원공 율곡 이이 7편

파주시 임진강변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은 원래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吉再)가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는데, 사후 그를 추모하여 서원이 세워졌다. 그 후 폐허가 되었다가 율곡 이이의 5대조인 강평공 이명신(康平公 李明晨)이 세종 25년(1443년)에 정자를 세우고 1478년 증조부 이의석(李宜碩)이 중수(重修)하였다.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명명하였으며, 이이 때에 이르러 다시 중수된 유서 깊은 곳이다. 정자 주변에는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그 아래 임진강에는 밤낮으로 배들이 오락가락 하였으며, 밤에는 고기 잡는 등불이 호화찬란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임진강을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고 느티나무 몇 그루만이 그 시절을 증명해주고 있어 쓸쓸하다.

율곡 선생은 평소 정자에 제자들과 함께 기둥과 서까래 등에 들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먹여 두었다고 하는데,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당시(4월 29일 밤) 이항복이 화석정을 불에 태워 임진강변을 밝히자, 선조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한다. 율곡선생은 국사의 여가가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았고, 관직을 물러난 후에는 여생을 이곳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내면서 시와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져 80여 년간 터만 남아있는 것을 현종(顯宗) 14년(1673년)에 율곡선생의 증손이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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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복원한 것으로 건축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건물의 정면 중앙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花石亭 현판이 걸려 있으며, 내부 뒷면에는 율곡선생이 8세 때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가 걸려있다. 임진강이 휘돌아 흐르는 언덕에 세워진 화석정의 전망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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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세부시(八歲賦詩)>

林亭秋己晩(임정추기만) 숲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의 생각은 끝없이 이어지누나

遠水連天碧(원수연천벽) 먼 곳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불타네

山吐孤輪月(산토고륜월) 산은 외로운 둥근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 리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의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고?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새소리, 저녁 구름 속으로 사라지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