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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7일 수요일

궁인宮人 기씨 원의 황후가 되다 4편

■ 궁인宮人 기씨 원의 황후가 되다 4편

■ 궁인(宮人) 기씨 원의 황후가 되다 4편

기황후는 1353년 열네 살이 된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당시 중국의 상황은 몽고의 통치에 저항하는 주원장(朱元璋:명 태조) 같은 한족들의 봉기가 일어나면서 어느덧 원 제국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원제국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기씨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원 황실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제국 원나라는 중원을 점령했던 많은 북방민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고향으로 쫓겨갈 것이 뻔했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순제라는 무능한 최고경영자를 둔 원나라는 급속히 약화되었다. 1365년 제1황후가 세상을 뜨면서 25년 간 제2황후의 자리에 있던 기씨가 드디어 제1황후가 되자, 그녀는 과감한 체질개선을 다시 시도했으나 이미 원 제국은 회생불능이었다.

원사(元史)는 순제가 ‘정사에 태만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기황후는 이런 무능한 황제를 젊고 유능한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황후는 순제를 양위(讓位)시키고 황태자를 즉위시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기황후의 지시를 받은 자정원사 박불화가 양위를 추진하자 순제는 거세게 반발했다. 순제는 무능하고 태만할지언정 황제의 자리를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대신 황태자에게 중서령추밀사(中書令樞密使)의 직책과 함께 군사권을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러나 약해진 원나라 세력을 밀어내면서 세력을 넓혀가던 주원장은 불과 1년 후 연경북경을 빼앗고, 원은 북쪽 몽골초원으로 쫓겨났다. 순제는 기황후와 황태자를 데리고 북쪽 응창부로 피난했지만, 응창부도 위험해지자 원나라의 초기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천도했고 이 과정에서 순제가 1369년 4월 23일 이질로 사망했다.

그리고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황제에 올랐지만, 그녀의 인생 역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원은 새로 일어난 명에 밀려 쇠퇴하였고, 그 이후 기황후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기황후는 카라코룸에서 아들이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는 것을 보고 황태후가 되어 살다가 죽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경기도 연천군에 그녀의 묘가 있었다고도 하고, 실제로 인근에서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석물 2기도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기황후가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연천에서 여생을 마친 게 아닌가하는 추정도 가능하지만, 그 역시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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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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