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형宮刑과 사마천 1편
■ 궁형(宮刑)과 사마천 1편
궁형(宮刑)은 고대 중국에서 시행되던 5가지 형벌 가운데 하나로, 사형에 준하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남자에게만 행하는 형벌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행해지는 형벌이었다. 남자는 생식기를 없애거나 썩게 했으며, 여자는 질을 폐쇄시켜 자손 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방법에 있어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음경을 잘라내거나 고환을 실이나 줄로 칭칭 동여매어 그것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이었다.
궁형을 받은 사람으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기전체(紀傳體) 통사(通史)의 효시를 이루는 한나라 『사기(史記)』의 작자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문서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태사령(太史令)이었다. 사마천과 같이 태사령이었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기원전 110년 병환으로 사망하면서 아들인 사마천에게 자신이 저술하던 역사서를 완성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당시 사마천의 나이는 36세였고,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완성한 것은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55세 때였다. 그가 『사기(史記)』를 저술할 때는 종이가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죽간(竹簡)과 목간(木簡)에 526,500자의 한문을 칼로 새겨 기록하였다고 한다. 사마천은 치욕스러운 궁형을 당하면서까지 생명을 부지하면서 『사기(史記)』를 완성시켰다. 그럼, 사마천은 왜 궁형에 처해졌을까?
한 무제 때, 젊은 장수 이릉(李陵)은 활솜씨로 유명하여 오천 보병(步兵)을 고르고 골라 뛰어난 궁사(弓師)군단을 만들었다. 한의 변방(邊方)을 괴롭히던 흉노족과의 전투에서 이릉의 부대가 뛰어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 활 솜씨 덕분이었다. 하지만, 연속 8일간의 생사를 넘나드는 교전으로 이미 이릉의 화살은 모두 바닥이 났다. 이 소식을 들은 흉노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이릉을 맹공(猛攻)하게 된다. 이릉도 군대를 이끌고 맹렬히 반격해 보았지만, 화살이 다 떨어지고 나니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었고, 한나라로 되돌아 갈 수도 없었다. 5천 보병 중 4백여 명이 남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전사했다. 결국 이릉은 부대를 이끌고 흉노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릉이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 무제는 매우 분노했다. 조정에서는 상하(上下)가 모두 분기탱천하여 이릉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황제에게 이릉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후손들을 잡아들여 처형하고 뼈를 갈아 뿌림으로써 후대에 경계로 삼아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런 가운데, 유독 한 사람만이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며 그저 조용히 서 있었다. 그가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은 그의 관직이 그저 역사를 기록하는 태사령(太史令)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소에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이 대신이 오히려 황제의 주목을 받았고, 일생이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다. 이 대신이 바로 ‘사마천’이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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