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 암살의 진실 1편
■ 김구 암살의 진실 1편
1949년 6월26일. 탕! 탕! 총성이 울리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지주이며 민족지도자인 김구선생이 숙소인 경교장에서 암살당했다. 인중과 배에 1발씩, 목 아래에 2발의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범인은 당시 현역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 범행의 동기에 대해 “김구가 정부 수립을 앞두고 남한의 총선거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위해 김일성을 방문하는 등 혼란을 조장해서 정부수립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총을 쐈다.”라고 밝혔다. 안두희는 자신의 단독 범행이라고 진술했으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았고 분명히 배후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백범 김구는 해방 직후 중국에서 귀국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김구선생은 해방 이후 치열한 좌우대립의 과정에서 신탁통치 반대운동 등 우파의 정치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947년 말 남북 분단의 가능성이 커지면서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결별하고, 중도파였던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남북협상’ 등 분단을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힘썼다. 하지만, 결국 분단을 막지 못한 김구는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사실상 정계 2선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중 1949년 6월 26일 현역 육군 포병소위이자 김구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당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숙소이자 집무공간이었던 서울 경교장에서 4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한 것이다. 당시 안두희의 나이는 32세였고, 김구선생의 나이는 73세였다. 김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온 국민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였다. 김구 암살 후 장례식까지 10일 간 다녀간 조문객은 약 120여 만 명으로 추산되었고, 건물 안에 들어오지 못한 문상객도 많았다. 장례식이 있던 7월 5일 서울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약 40∼50만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각각 수만 명씩이 모여 고인을 애도하였다.
사건 당시 정부와 군 당국은 이 사건을 한독당 내부 갈등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아갔다. 사건 직후 국방부는 안두희가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노선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이다가 김구를 살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시키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게 했다는 혐의로 한국독립당 조직부장이자 광복군 지휘관이었던 김학규(金學奎)를 구속하였다.
7월 2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이 사건이 한국독립당의 내분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 20일 군 당국은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하는 친공산주의인 한국독립당의 음모에 맞선 안두희의 ‘의거’라고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안두희는 재판 중에 2계급 특진(特進)을 하였고, 사건 1년여 만에 형 면제 처분을 받고 군에 복귀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특혜를 받았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