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구 암살의 진실 2편
■ 김구 암살의 진실 2편
안두희는 해방 후 서북청년회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교했다. 포병장교로 임관된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권총을 몸에 숨기고 김구가 기거하던 경교장을 방문했다.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던 김구는 아무런 대비 없이 안두희가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백범 김구의 암살 배후에 대해서는 이승만이나 미국 OSS, 김창룡 등 여러 설(說)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사건과 관련된 공식적인 기록이 현재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두희의 심문기록은 물론 재판기록조차도 남아있지 않다. 이승만 정권은 민간과 군 정보기관 그리고 경찰을 동원하여 백범 암살에 관련된 모든 기록을 제거했다. 조직적인 기록 말살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국회에서도 「김구선생 암살진상규명조직위원회」를 통해 조사를 진행했지만 이렇다 할 결실을 맺지 못했다.
김구선생 암살로 ‘민족의 대역(大逆)죄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안두희(1917~1996)는 1949년 8월 5일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으나, 석 달 뒤에는 15년으로, 1950년 3월에는 10년형으로 감형을 받았다. 이것은 유례없는 ‘초고속 감형’이었다. 서울 육군형무소에서 복역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감자 중 15년형 이상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모두 처형하는 가운데 안두희는 참모총장의 지시로 형집행정지를 받고 풀려나 바로 군에 복귀했다. 그리고 1951년에는 잔형을 면제받았고 대위로 전역(轉役)하였으며, 1953년 2월 15일에는 완전 복권(復權)되었다.
안두희는 강원도 양구에서 1956년 10월부터 10년 정도 여러 사단과 군단에 두부, 콩나물, 쇠고기, 돼지고기 등을 납품하는 군납 식료품 공장인 ‘신의기업사(信義企業社)’를 창업하여 경영하였다. 그는 중형을 면하였을 뿐 아니라 1년여 밖에 복역하지 않았다. 석방 후에는 군부가 군납사업을 알선해 주었던 사실에서 그를 비호하는 세력이 있거나 배후에 분명히 누군가가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이승만(李承晩) 정권 하에서 그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강원도에서 납세액 2~3위를 차지하는 등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안두희는 평생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민족주의자들에게 납치와 협박을 당하였고, 흉기 피습도 여러 번 당했다. 테러를 피해 신분을 감추고 거처를 여러 번 옮겨가며 살아야만 했다. 가족들은 이미 그의 정체를 알고 이혼 후 다른 나라로 이민 간 상태였다. 안두희 자신도 전처와 자녀들처럼 이민을 시도하였으나 정체를 알아본 출입국관리 담당자들이 출국을 허락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