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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8일 월요일

김구 암살의 진실 4편

■ 김구 암살의 진실 4편

■ 김구 암살의 진실 4편

권중희씨의 안두희에 대한 추적 및 응징은 안두희가 부인과 자녀를 모두 미국에 보내고 서울 가락동의 한 아파트에서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둔생활을 하며 외롭게 숨어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1983년 본격화되었다. 1987년 3월 28일 그를 알아본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씨는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그를 폭행했다. 병원에 실려가 치료를 받던 안두희는 언론과 세인들의 관심이 쏟아지자 병원에서 몰래 도망쳐 다시 몸을 숨겼다.

1992년 2월에 다시 안두희를 찾아낸 권씨는 안두희를 강제로 백범 묘소에 참배케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안두희를 납치해 경기도 가평의 한 농장에 감금해 놓고 동아일보 기자와 함께 사건진상을 캐물었다. 이때 안두희는 중대한 고백을 했다. 안두희는 범행 직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고, 김창룡으로부터 김구 살해를 지시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 증언은 큰 화제가 되었으나, 증언의 세부 내용이 번복되거나 내용의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

역사의 심판은 박기서(1950년~ )씨에게로 넘어갔다. 1996년 10월 23일 경기도 부천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던 박기서씨는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부천시장의 그릇가게에서 홍두깨(40cm크기의 몽둥이)를 4천원 주고 샀다. 홍두깨에는 ‘정의봉(正義棒)’이라는 글씨를 직접 크게 썼다.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 있는 안두희가 사는 아파트에 들어가 안두희와 같이 살고 있던 부인을 묶어두고 안두희에게는 장난감 권총을 겨누며 두 손을 묶고,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내려쳐 때려 죽였다.

박기서씨는 안두희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성당에 가서 고해성사를 한 뒤 경찰에 자수했다. 그는 범행동기에 대해 자신은 학창시절부터 김구를 존경해 왔고 1995년 초 『백범일지』를 읽은 뒤 백범의 유지를 이어야겠다고 결심했으며, 권중희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라는 책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박씨가 언론에 밝힌 안두희 살인의 동기는 순전히 애국심과 백범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그는 경찰에 자수한 직후 “의로운 일을 했으니 후회라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기자들에게 “나는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최소한 민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인간쓰레기 하나를 처단하는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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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사회 각계 인사들은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9,200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인천지방법원에 제출하는 등 구명 운동을 펼쳤다. 시민들은 그의 자택에 격려금과 위로 편지들을 보내기도 했다. 1997년 3월 검찰은 징역 8년을 구형하였으며, 4월 인천지법은 정황을 참작하여 살인죄 최소형량인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이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으로 형량이 감형되었고, 1997년 11월 대법원 상고심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되었다. 재판부는 박씨의 범행 동기는 주관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으나, 법질서 전체 관점에서는 용인될 정당성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라며 형량 확정의 취지를 밝혔다. 박기서는 1998년 3월 13일, 1년 3개월 만에 정부의 대사면 때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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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