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담 3편
■ 꽃담 3편
경복궁에 들어서서 안쪽으로 쭉 걸어 들어가면, 예쁜 꽃담의 보호를 받는 자경전에 다다른다.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자미당(紫薇堂) 터에 고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신정익왕후)를 위해 지었으나, 불에 타버려 고종 25년(1888)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은 자경전 뒷담의 한 면을 돌출시켜 만들었는데, 네모 형태로 가운데는 동식물 무늬인 십장생(해, 산, 물, 돌, 구름, 솔, 학, 불로초, 거북, 사슴-십장생물)을 새겨 넣었다. 십장생 무늬는 가장 한국적인 무늬로 알려졌는데, 이것은 조대비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여 제작한 것이다.
조선 태종은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고 경회루를 세우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왕비 침전) 뒤뜰에 인공동산을 세웠는데 이를 아미산(峨眉山)이라 하였다.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고종 2년(1865) 경복궁을 고쳐 세울 때 만든 것이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를 상징하는 무늬, 화마와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 형태와 그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년)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別宮)으로 만들었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창덕궁 후원에 자리하고 있는 낙선재는 1847년 후궁 김씨의 처소로 지어졌으며, 본래 이름은 낙선담이다. 낙선재는 여러 황족들이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유명한데,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마지막 공주 덕혜옹주, 두 나라를 조국으로 섬겨야 했던 이방자여사 등 비운의 주인공들이 한 많은 삶을 이곳에서 마쳤다.
낙선(樂善)이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국상을 당한 왕비와 후궁들이 상중에 거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그런 이유로 낙선재는 궁궐의 건축물답지 않게 매우 소박한 느낌이지만, 주위를 둘러싼 담만큼은 매우 화려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낙선재의 담은 꽃무늬 장식의 화초담이다. 낙선재의 ‘화초담’은 화려함에 화려함을 더하고, 그 화려함에 길(吉)한 마음을 그대로 펼쳐내고 있다.
낙선재에서 석복헌으로 통하는 뒤뜰 샛담에는 단아한 모양의 포도나무가 새겨져 있다. 예나 지금이나 포도나무는 다산, 다남을 상징하는 까닭에 뒤꼍 여인들이 다니는 자리에 이런 무늬를 그려놓은 것이다. 이 또한 우리 선조들의 은근하고 함축성 있는 해학을 읽을 수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