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들 1편
■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들 1편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과 일본 간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공포됐다. 이 조약은 이미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인(調印)해 둔 것이었다. 이미 조인된 조약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일주일 만인 8월 29일, 순종황제의 조칙 형태로 발표했다.
이 조약이 공포됨에 따라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 편입되면서 우리민족은 나라를 잃었다. ‘한일병탄(韓日倂呑:남의 영토를 뺏아 제 것으로 만듬)‘, 이른바 경술국치(庚戌國恥:경술년의 국가적 치욕)’라 기록되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조약의 조인에는 순종황제의 비준(批准:최종 확인 동의) 절차가 빠져 있었고, 순종황제의 서명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 조약은 엄밀히 말해서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 무효이다. 그러나 법적으로 무효든 아니든 한일병탄조약은 한국을 일본령(領)으로 규정한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었다.
한국은 명목상의 독립국이었을 뿐, 사실상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었으며, 1909년에는 기유각서(己酉覺書)를 통해 이미 경찰권과 사법권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1909년 4월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와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은 이토 히로부미를 방문해 한일합방에 필요한 계획을 만들었다. 가쓰라 일본 총리는 우리나라가 병합의 필요성을 열망하도록 하는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즉 우리나라가 합방 청원을 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같은 해 7월 6일 내각회의에서 이 방침을 확정한 뒤 일왕의 재가를 받아놓고 있었다.
이 ‘병합 청원’ 시나리오에 동원된 것은 일본 정·재계 흑막의 실력자이자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의 고문 스기야마 시게마루와 정미칠적(1907년 한일신협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7인)으로 불리는 송병준이었다. 송병준은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대한제국 국민이 합방(合邦:두나라를 합침)을 간절히 원하다는 여론을 조작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뒤에 다시 일본에 건너가 일제의 정객들을 상대로 ‘합병’을 요구하는 매국 외교를 펴기도 했다.
송병준의 이러한 활동을 눈치 챈 이완용은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와 조선병탄 교섭에 나섰다. 일제는 이 무렵, ‘통감부에서는 이완용 내각을 와해시키고 송병준 내각을 구성하도록 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두 사람의 충성 경쟁을 부추기려는 전술이었다. 이완용은 송병준 내각이 들어서면 자신이 보복당할 수도 있고, 합방의 공(功)을 빼앗기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자신의 내각이 합방조약을 맺을 수 있음을 자진해서 통감부에 알렸다. 일본어를 할 줄 몰랐던 이완용은 일본에 유학했던 비서 이인직을 교섭에 나서게 했다. 일제는 자신들의 책략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자, 이용구·송병준 등을 이용해 ‘합방 청원서’ 공작을 시작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