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들 2편
■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들 2편
통감 데라우치는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내세워 합방청원을 올리고, 이를 이완용이 순종황제에게 승인을 요구하고, 순종황제가 천황에게 합방을 제의하는 식의 절차를 밟고자 했다.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일진회 성명서’를 국민신문에 부록으로 발표했다. 동시에 ‘합방 상주문’, ‘총리 이완용께 올리는 합방 청원서’, ‘통감께 올리는 합방 청원서’ 등도 함께 제출했다.
1910년 2월 2일 일본 총리 가쓰라는 “일진회의 수년에 걸친 친일적 성의를 이해하고, 일진회의 청원을 수리한다.”고 말했다. 8월 16일 데라우치는 이완용을 관저로 불러 병합의 승인을 요구하며 미리 준비해뒀던 각서를 수교(手交:직접 전함)했다.
조약 체결이 다가오자 일제는 이 사실이 알려져 소요가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일본군을 서울로 이동시켰다. 조약 체결일인 8월 22일에는 용산에 주둔한 제 2사단을 동원해 경비를 담당케 했다. 8월 18일 대한제국 정부의 마지막 내각회의에 합병조약안이 올랐다. 내각 대신 가운데 학부대신 이용직만이 조약에 반대하다가 쫓겨났고, 나머지 대신들이 조약 체결에 찬성함으로써 조약안은 통과됐다.
이 마지막 각의에 협조한 대신들은 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겸 시종 무관장 이병무, 승녕부 총관 조민희 등 8명이었다. 이들은 한일 병탄 조약 체결 이후 공을 인정받아 일본으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았다. 이들을 가리켜 ‘경술국적’이라 한다.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이어 경술국적에도 그 이름을 올렸다.
8월 22일 형식적인 어전회의가 열려 이완용이 전권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되어 황제의 위임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순종은 위임장에 옥새를 찍으려 하지 않았다. 황후 윤씨가 옥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놓지 않자, 시종원경(시종원의 수장) 윤덕영(황후의 외숙부)이 빼앗아 찍었다. 윤덕영은 이 공으로 ‘국적(國賊)’에 이름을 올리고 매국노의 대열에 합류했다.
합병조약이 조인될 때까지 데라우치 통감과 이완용 사이를 오가며 매국 공작을 꾸민 자는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었다. 그리하여 신소설 《혈의 누》, 《귀의 성》, 《은세계》 등을 발표한 이인직도 <친일인명사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8월 22일 오후 통감관저 2층 데라우치 침실에서 한일합병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이 체결된 뒤에도 일제가 발표를 미룬 것은 우리 민족의 저항이 두려워서였다. 조약 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이양(移讓)의 조칙을 내리도록 강요했다.
8개 조로 된 조약 제1조에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나라를 잃었다. 나라가 망한 뒤 매국의 은사(恩賜:은혜로운 물건)를 받은 반역자들의 삶은 안락했지만, 백성들은 가혹한 식민지배와 수탈의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정작 망국(亡國)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 가운데 그것을 감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