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중일기 2편
■ 난중일기 2편
이순신은 정유재란 기간에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들의 죽음까지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1597년 10월14일에는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에서 와 집안 편지를 전하였는데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졌다. 겉봉을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거죽에 ‘통곡’ 두 글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서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시는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마땅한데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하여 아들 잃은 슬픔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아침에 옷 없는 군사 17명에게 옷을 주고는 여벌로 한 벌씩을 더 주었다. 하루 내내 바람이 험하게 불었다(1596년 1월23일)』 이 기록에서 군사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류성룡과의 절친한 관계도 잘 나타나 있다. 두 사람의 깊은 우정과 두터운 신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좌의정 류성룡이 편지와 함께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보내왔다. 수륙전과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이 낱낱이 설명돼 있었다. 참으로 만고에 보기 드문 뛰어난 저술이다(1592년 3월5일).』 『유자 30개를 영의정 류성룡에게 보냈다(1595년 9월17일)”는 등의 기록에는 두사람의 깊은 우정과 신뢰가 나타나 있다.』
억울하게 죄인이 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고 풀려나던 그 날의 《난중일기》는 다음과 같다.
『초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인용자. 이하 같음)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菶)․분(芬), 아들 울(蔚-이순신의 차남),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같은 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喜壽), 이상(貳相,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곽영(郭嶸)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일기는 기본적으로 자신만의 내밀한 기록이다. 후세에 공표될 가능성을 고려하거나 그럴 의도를 담고 있지는 않다. 이 날의 일기는 이순신의 내면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만을 적었다. 그동안 승전을 거듭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했지만, 충분한 근거도 없이 갑작스레 압송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은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고통과 억울함과 분노는 철저하게 억제되어 있다. 그는 오직 사실에 입각해 사고하고 행동했다. 이것이 그의 승리의 원동력이고 그와 동시에 그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