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3편
■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3편
조식 하면 당대에 늘 비교되곤 했던 인물이 퇴계 이황(1501~1570년)이다. 대부분 이황과 가장 선명하게 비교되는 인물로 율곡 이이(1536~1584년)를 꼽지만 이이는 이황과 조식의 후배 학자며, 이황의 가장 큰 라이벌은 조식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1501년) 영남 지역에서 태어나, 당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경상도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나뉘었는데, 이황의 근거지 안동과 예안이 경상좌도의 중심지였으며, 조식의 근거지 김해, 산청, 진주는 경상우도의 핵심 지역이었다. ‘좌퇴계 우남명’으로 지칭된 것도 두 사람이 지역을 대표한 학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학자는 기질과 학풍, 현실관 등에서 분명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이황이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발전시켜간 유학자로서 당시의 지적 수준을 높여갔던 학자라면, 조식은 경과 의를 바탕으로 성리학의 실천을 중시한 학자였다. 이황이 기대승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조식은 ‘사단칠정’ 논쟁에 대해 “이것이 백성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일침을 가함으로써 그의 가치관을 분명히 말해주었다.
18세기 실학자 이익은 조식과 이황을 영남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정하면서 ‘이황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조식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비교했다. 조식의 의(義)는 상벌에 엄격한 무인의 기질에 어울리며, 그가 차고 다녔던 ‘칼’과 맥락을 같이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현실 인식에도 반영됐다. 이황과 조식은 사화를 겪으며 관직에 오르기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그러나 명종 대 이후 현실의 모순이 점차 해소됐다고 판단한 이황은 관직에 나아가 경륜을 펴는 것 또한 학자의 본분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황과 달리 조식은 자신이 살아갔던 시대를 모순이 절정에 이른 ‘구급(救急)’의 시기로 파악하고 끝까지 재야의 비판자, 처사로 남을 것을 다짐하고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왜적에 대한 입장도 서로 달랐다. 이황이 일본과의 강화 요청을 허락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등 주로 교린(交隣) 정책을 펼친 반면, 조식은 일본에 대한 강력한 토벌 정책을 주장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왜적이 설치면 목을 확 뽑아버려야 한다’는 강경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활약하면서 명종 시대의 정국과 학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친 두 사람, 이황과 조식. 비록 왕의 측근에서 활약한 정치 관료는 아니었지만 당대는 물론, 후대 조선에 미친 학문적, 사상적 영향은 매우 컸다. 당대의 대표적 지성이고 학자라 할 수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