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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4일 목요일

추선秋扇 - 가을철의 부채, 철이 지난 물건,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인

추선秋扇 - 가을철의 부채, 철이 지난 물건,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인

추선(秋扇) - 가을철의 부채, 철이 지난 물건,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인

가을 추(禾/4) 부채 선(戶/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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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쫓는데 가장 간편한 부채는 다른 곳에도 쓰임새가 많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접부채 合竹扇(합죽선)은 전통혼례 때 신랑신부의 얼굴을 가리는 의례용에서 고전 무용 부채춤으로, 무당들이 굿을 할 때도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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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서화가의 그림이나 시를 쓴 작품으로 내려오는 문화재도 된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무더위를 가시게 했던 것이 선풍기나 에어컨이 흔한 요즈음에는 주목적을 잃어가는 중이다. 이것을 애틋하게 여기며 노래한 것이 있다. ‘선풍기나 에어컨은 인간의 피부를 시원하게 한다. 그러나 부채는 피부보다 마음을 더 시원하게 한다.’(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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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더위를 쫓고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부채라도 계절에 맞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가을의 부채(秋扇)라는 말은 날이 무더웠던 여름철에 귀한 존재였던 것이 서늘한 계절이 돌아오면 홀대를 받는다는 말이다. 秋風扇(추풍선)도 같다. 필요할 때는 대접을 받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경시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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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인을 뜻한 것으로 중국 前漢(전한)의 12대 황제 成帝(성제, 재위 기원전33~7) 때의 후궁 班婕妤(반첩여)의 시에서 비롯됐다. 婕은 궁녀 첩, 첩여는 한나라 때 궁중여관의 관직명이다. 반첩여는 漢書(한서)를 저술한 班固(반고)의 왕고모가 된다는데 성제의 즉위년에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한 몸에 받고 단기간에 첩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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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기간도 잠시, 황제의 손바닥에서도 춤춘다는 날씬한 미모의 趙飛燕(조비연)이 들어오자 사랑이 식었다. 더군다나 조비연의 모략으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서도 임금의 총애는 돌아오지 않았다. 반첩여는 번뇌와 서글픔으로 자신이 가을의 부채 신세라며 ‘怨歌行(원가행)’이란 시를 지었다. 뒷부분에 한탄이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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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 품과 소매 속을 드나들며 움직일 때마다 미풍을 일으켰지(出入君懷袖 動搖微風發/ 출입군회수 동요미풍발), 항상 두려운 것은 가을바람이 불어와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듯(常恐秋節至 凉飇奪炎熱/ 상공추절지 양표탈염열), 대나무 상자 안에 버려져 은혜와 애정마저 끊겨버리네(棄捐篋笥中 恩情中道絶/ 기연협사중 은정중도절).’ 飇는 폭풍 표, 篋은 상자 협, 笥는 상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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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첩여는 서인 신세가 된 후에도 후일 성제의 능묘를 지키며 그의 시가 文選(문선)에 실려 오랫동안 기억됐다. 唐(당)의 문인 張九齡(장구령)이 읊은 대로 가을 기운에 사랑을 빼앗겨도 ‘작은 상자 속에서 은혜는 남아 감사(終感恩於篋中/ 종감은어협중)’하게 된 셈이다(白羽扇賦/ 백우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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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부채는 조금의 미련이 남아도 겨울까지 가면 夏爐冬扇(하로동선)이란 말대로 철에 맞지 않거나 쓸모없는 사물을 빗대 아무 소용없는 말이나 재주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말도 계절은 돌고 도니 지금 쓰이지 않아도 함부로 괄시할 일은 아니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