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관 김처선金處善
■ 내관 김처선(金處善)
김처선(? ~ 1505년)은 환관들이 흔히 그렇듯 출신이 애매하고 정확한 출생 연도를 알 수는 없으나, 세종부터 연산군에 이르기까지 일곱 임금을 시종하여 조선 궁중역사의 산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환관(宦官)으로서는 최고위 내시인 판내시부사 겸 상선을 역임했다. 몇 차례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기도 했으나 곧 다시 복직되었다. 1455년(단종3년)에는 정변에 관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유배되어 본향의 관노가 되었다가, 세조 때 다시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6년)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추록되었으나, 다시 세조로부터 시종이 근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아 자주 장형(杖刑)을 당하였다.
성종 때는 전어(傳語:통역)에 공이 있고, 의술을 잘 알아 대비의 신병 치료에 이바지하였다 하여 상급을 받기도 하였으며, 품계가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즉위하고 초기에는 총애를 받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곧 직언을 잘하여 미움을 받았다. 1505년 연산군이 기녀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벌여 그 음란함이 극에 달하자, "이 늙은 신(臣)은 4대 임금을 섬겨 대략서사(書史)에는 통하나, 고금의 군왕으로 이토록 문란한 군왕은 없었소이다." 라고 정이품의 노(老) 환관 김처선은 목숨을 걸고 연산군에게 고(告)했다.
이에 분노가 폭발한 연산군은 활시위를 당겨 김처선의 갈비뼈를 관통하였다. 하지만 김처선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임금에게 간언했다. "조정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다만 상감마마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게 될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산군은 화살 하나를 더 쏘아 쓰러뜨리고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런 다음 김처선에게 일어서서 걸으라고 명했다. 이에 김처선은 "상감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어 다닐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고, 연산군은 김처선의 혀를 잘라버렸다. 그 시체는 호랑이에게 먹였다.
그런데 연산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김처선의 양자 이공신을 죽이고 그의 집 재산도 몰수해버렸다. 부인 서씨와 며느리는 노비로 삼았고, 김처선의 부모 무덤을 뭉갠 다음 무덤가의 석물도 모두 없애게 했다. 그의 집도 허물고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뿐 아니라 김처선의 이름인 처(處)와 선(善) 두 글자를 온 나라에서 쓰지 못하도록 했으며, 전국에 있던 "김처선"은 개명을 명령받았다, 심지어 처서(處暑)는 \조서\로, 처용무(處容舞)는 풍두무(豊頭舞)로 이름이 바뀌었다. 심지어 과거에 급제한 답안지에 처(處)자가 들어있다 하여 합격을 취소되기도 하였다.
관료들도 쉽사리 바른말을 하지 못하는 연산군 시대에 목숨을 걸고 올바른 소리를 올린 김처선은 정말 대단한 충성과 용기를 지닌 사람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직언하는 충정(忠情)의 상징이 되었다. 연산군이 폐위된 뒤 1512년(중종7년) 김처선의 행적을 《속삼강행실》에 수록하려 하였으나, 환관의 힘이 세어질 것을 두려워했던 중종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 뒤, 1751년(영조27년) 충신의 정문(旌門:충신을 상징하는 붉은 문)이 내려져 그의 공을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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