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2편
■ 노비에서 포도대장까지 2편
정충신이 나중에 임금의 총애까지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에 공을 세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평소에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자기 개발에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부모와 세상을 원망하고 한탄하지만, 정충신과 같이 언제나 노력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능력을 갈고 닦는 자에게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놓치지 않고 반드시 잡을 수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정충신의 사례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귀감이 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1608년 조산보만호에 임명되어 무관으로 활동했고, 1614년(광해군 6년) 8월 27일 위성원종공신 2등(衛聖原從功臣二等)에 책록되었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를 가는 스승인 이항복과 함께 북청으로 동행하였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도원수 강홍립이 출병하였으나 후금에 대패하는 일이 일어나자 여진족의 정황에 밝았던 그가 다시 등용되었다. 워낙 외교술까지 좋았기 때문에 무신이면서도 북방민족과의 외교까지 맡아 일했다.
1621년(광해군 13년)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했으며, 이 때 왕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하면서 외교가로서의 면모를 발휘하기도 하였다. 후금에 사신으로 다녀온 후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한편으로 조선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였다. 이후 안주목사 겸 방어사가 되었을 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나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괄은 12000명의 대병력으로 밀고 내려와서 한양까지 점령해 버렸다. 원래 이괄과 남이홍 정충신은 친한 사이였지만 임무에 강직한 정충신과 남이흥은 한양까지 이괄을 추격했다.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활약하며 겨우 2천명의 병사로 이괄을 계략에 빠트린 후 황주와 서울 안현에서 싸워 이겨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졌다. 광주광역시의 옛 전남도청 앞에서 유동 4거리 가는 길인 ‘금남로’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반란군에게 한양까지 빼앗겼던 인조는 되돌아와서 이들을 치하했다.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앞장선 공으로 충청남도 서산 일대의 토지를 사패지(賜牌地:나라에서 하사받은 땅)로 받게 되었는데, 그의 후손이 서산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