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고순목堯鼓舜木 - 요임금의 북과 순임금이 세운 나무, 다른 사람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일
요고순목(堯鼓舜木) - 요임금의 북과 순임금이 세운 나무, 다른 사람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일
요임금 요(土/9) 북 고(鼓/0) 순임금 순(舛/6) 나무 목(木/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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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始皇(진시황)이 처음 썼다는 皇帝(황제)라는 칭호는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三皇(삼황)과 五帝(오제)에서 땄다. 누가 포함되는지 구구한 가운데 오제의 堯(요)와 舜(순)이 빠지는 경우는 없다. 그만큼 堯舜(요순)이 덕으로 천하를 다스려 堯舜時代(요순시대), 堯舜之節(요순지절), 堯年舜日(요년순일) 등의 말로 태평성세의 대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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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임금은 지혜로웠고 인정이 넘쳐 백성들은 누가 다스리는지도 모르고 擊壤歌(격양가)를 불렀다. 두 임금이 이처럼 선정을 베풀 수 있었던 데에는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던 데서 찾는데 바로 요임금의 북(堯鼓)과 순임금이 세운 나무(舜木)라는 성어가 잘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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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임금은 자신이 독단적인 정치를 할 것을 염려하여 대궐 문 앞에 敢諫鼓(감간고)란 북을 달았다. 백성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나 나라에 아뢸 일이 있으면 북을 치도록 하여 여론을 수렴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요임금의 禪讓(선양)으로 제위에 오른 순임금은 또한 스스로 부족함이 있을까 걱정하며 箴木(잠목)이라 불리는 나무를 대궐 앞에 세우고 고충과 의견을 펼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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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전하는데 먼저 前漢(전한)의 劉安(유안)이 저술한 책 ‘淮南子(회남자)’ 기술부터 보자. ‘요임금은 감히 간언하는 북을 설치했고(堯置敢諫之鼓/ 요치감간지고), 순임금은 그릇된 정치를 꾸짖는 나무를 세웠다(舜立誹謗之木/ 순립비방지목).’ 主術訓(주술훈)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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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당)의 멸망까지 다룬 新唐書(신당서)와 함께 정사 二十四史(이십사사)에 드는 ‘舊唐書(구당서)’의 표현은 ‘요임금은 북을 두드려 간언하도록 했고, 순임금은 나무를 세워 경계할 말을 쓰게 했다(堯鼓納諫 舜木求箴/ 요고납간 순목구잠)’로 되어 있다. ‘史記(사기)’에선 漢(한)의 呂后(여후) 일당을 물리친 뒤 제위에 오른 文帝(문제)가 요순의 선정을 말하면서 약간 달리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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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조정에 선으로 나아가도록 훈계가 되는 깃발과 헐뜯을 수 있는 나무가 있었다(朝有進善之旌 誹謗之木/ 조유진선지정 비방지목).’ 그런데 남을 헐뜯는 비방을 처벌하고 있으니 과실을 들을 수 없다고 그 법을 없애라고 했다. 孝文本紀(효문본기)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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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대궐 밖 문루 위에 달았던 요임금의 북은 우리 조선에도 있었다. 太宗(태종)이 즉위하면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 해결하지 못한 寃抑未伸者(원억미신자)를 위해 설치한 申聞鼓(신문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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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통은 권익위의 ‘국민신문고’나 청와대서 운영한 ‘국민청원’으로 연면한 전통을 이어 왔었다. 이러한 제도보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두루 들으면 현명해진다는 兼聽則明(겸청즉명)이나 귀를 씻고 공손히 듣는 洗耳恭聽(세이공청)의 자세가 지도자에게는 더 중요하다. 법이 공정히 집행되고 남을 먼저 배려한다면 요임금의 북을 칠 일 자체가 없어진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