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청 2편
■ 단청 2편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 주재료로 사용된 소나무는 목질이 강한 반면에 표면이 거칠고 건조 시 열상이 크며, 해충과 부식의 피해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단점을 보강해주는 도장(塗裝) 방법인 단청이 발달했다고 한다. 또한 전통시대의 건축은 정치적·종교적·신분적 위계질서에 따라 건물의 규모와 장엄의 정도가 엄격히 구별되었으므로, 건물에 따라 무늬와 색상 및 그 화려함의 정도를 다르게 했다. 왕의 거처인 궁궐과 부처의 상징적인 거주지인 불전의 안팎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게 단청을 하여 왕과 부처의 권위와 존귀함을 상징했다. 조선시대 단청에서는 장단·주홍·양청·양록·황·석간주 등을 주요색으로 사용했고, 주요색에 흰색과 먹색 등의 여러 색을 배합하여 다양한 색깔을 만들었다.
단청의 색 배열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는데 여기에는 민족의 고유한 색채감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분벽화를 통해 그 양상을 엿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부석사조사당·봉정사극락전·수덕사대웅전을 통해서 빛을 많이 받는 기둥이나 난간 등에는 붉은색을, 빛을 적게 받는 추녀나 천장 등에는 녹청색을 써서 명암의 장식적인 대비효과를 높인 상록하단의 원칙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무늬가 다양해지고 건물 외부에 등황색 계통을 많이 써서 매우 밝고 화려해졌는데, 이것은 조선건축의 다포양식이 복잡해지고 장식화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단청의 색조는 건물의 구조적인 표현성을 더욱 높일 수 있고, 다채로운 보색대비로 원색적이고 화려하면서도 색을 규칙적으로 반복·처리하여 색조의 율동과 조화를 이루어낸 것이 특징이다. 즉 한색(寒色)과 난색(暖色)을 엇바꾸면서 색의 층단을 구성했고, 보색대비와 명도 차이에 따라 색띠의 면적을 달리했으며, 대범한 명암효과도 내었다.
인류의 생활에서 채색그림이 출현하는 시기는 약 2만 년 전 동굴벽화로부터 시작된다. 당시의 동굴벽화나 천장그림들은 현재의 양식화(樣式化)된 단청과는 그 목적이 다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단청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단청의 가장 오래된 실례는 현존하는 고대건축물은 없고, 삼국시대의 여러 고분벽화를 통하여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당시의 건축양식과 단청의 모습을 보여 주는 다양한 채색무늬가 남아 있고, 또한 고분에서 출토된 채화(彩畫)·칠기(漆器) 등도 그 예의 하나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성골(聖骨) 이상에게만 오채(五彩)의 사용이 허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그 당시의 단청이 칠해진 건물은 하나도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최근에 발굴된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건축부재(建築部材)와 암막새 끝에 칠해진 주칠(朱漆)을 통해서, 당시 건축 장식의 중요 요소이던 단청의 섬세하고 아름다움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