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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31일 월요일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으로, 1894년 3월의 고부(백산) 봉기(제1차)와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2차)로 나뉜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된 후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봉건사회를 반대하고 서학과 왜를 배척하는 반외세사상을 주장하면서 조선 사회에 그 교세가 확산되었다.(참고: 동학사상) 이에 조선의 위정자들은 동학을 사교로 금지하고 1864년 혹세무민의 죄로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였으며, 이후 동학교도들에 대한 조선의 탄압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동학이 농민 대중에게 더욱 확산·조직화되면서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에 대한 억울함을 해소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었다.

교조신원운동 이후에도 계속되는 정부의 묵살과 더불어 전라도 군수 조병갑의 불법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되어, 동학교도들은 1894년 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도ㆍ충청도 일대 농민들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해 고부민란(古阜民亂)을 일으켰다.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정부에 대하여 조병갑의 횡포를 시정할 것과 외국 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한 결과, 정부로부터 폐정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다.

그러나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가 오히려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혹독하게 탄압하여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 운동은 안으로는 갑오개혁과 밖으로는 청ㆍ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이후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3월의 고부(백산) 봉기(제1차)와 9월의 전주·광주 궐기(제2차)로 나눌 수 있다.

● 제1차 봉기(반봉건 운동)

고부농민봉기로 뜻을 이루지 못한 전봉준은 무장지역의 손화중과 손을 잡고 다시 수천 명의 농민들을 모아 1894년 3월 21일 최시형의 탄생일을 기하여 고부 백산에서 궐기하였다. 이 사태를 접한 정부는 장위영 등의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농민군은 황토재 승리에 이어 정읍, 흥덕, 고창, 영광, 함평, 장성, 나주, 장성, 태인, 부안 등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삼남지방을 휩쓸고,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전주성을 점령한 후 관군과 농민군은 접전을 벌였고, 서로 타격을 입었다. 이즈음 조선 정부는 청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5월 5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하였다. 이에 나라 안팎에 위급상황을 인지한 전봉준은 5월 8일 관군과 폐정개혁을 실시한다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었다. 그러나 톈진조약(조선에 대한 청과 일본의 동등 파병권)에 따른 청나라 군의 개입을 빌미로 일본군은 5월 6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5월 9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화약을 맺은 관군은 몇몇 부대를 전주에 남기고 모두 철군하였고, 동학농민군도 철군 및 해산했다. 그러나 군현의 행정이 혼란과 마비상태에 이르자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의 상의 끝에 호남지방의 각 군현에 농민자치기구인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때 12개 폐정개혁안을 내걸고 민정(民政)을 실시하였다.

○ 폐정개혁안 12개 항목

① 동학교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일소하고 서정에 협력

② 탐관오리 엄벌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

⑤ 노비문서 소각

⑥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⑦ 청상과부의 개가 허용

⑧ 무명잡세 일체 폐지

⑨ 관리채용 시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 등용

⑩ 왜와 통한 자는 엄징

⑪ 기왕의 공사채를 무효로 할 것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

● 제2차 봉기(반외세 운동)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1차 봉기를 빌미로 조선에 입성한 일본군은 내정간섭을 강화하였고 6월 2일 김홍집을 앞세운 친일내각을 설립하여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하였다. 이어 6월 21일에는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23일 청·일전쟁을 일으킨 후, 25일 1차 갑오개혁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행태를 전해들은 전봉준은 일본군 척결을 위해 김학진과 손을 잡고 제2차 기병을 준비, 9월 18일 삼례에서 집결(제2차 삼례봉기)하여 서울로 향했고, 이는 반일감정이 쌓여 있던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민중봉기가 확산되자 정부는 군을 출병시키고 일본에 출병을 요청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치열한 접전 끝에,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의 개입으로 고전하다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했다. 이후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져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