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량대첩 1편
■ 명량대첩 1편
1592년 음력 7월, 조선 수군에 번번이 패한 왜군은 바다에서의 세력을 되찾기 위해 전 함대를 모아 남해로 출동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학익진으로 왜군을 섬멸하라!"
"이순신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조선 수군은 왜군 함대가 진을 친 통영 앞바다로 나아가 판옥선 몇 대로 왜군을 꾀어내 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나오게 했다. 그런 뒤 거북선을 중심으로 나란히 후퇴하는 것처럼 보였던 판옥선들이 학이 날개를 펴듯 양쪽으로 펼쳐져 일본 군함들을 둘러싸고 공격을 퍼부었다. 이 전술은 학(鶴)이 날개(翼)를 편 모양으로 적을 둘러싸고 공격한다고 하여 학익진(鶴翼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한산도대첩에서 학익진전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면, 1592년 음력 9월에 벌어진 부산포해전에서는 장사진(長蛇陣)이라는 전법으로 승리를 이끌었고, 1597년 음력 9월에 벌어진 명량해전에서는 명량해협의 좁은 지형과 빠른 물살을 이용하여 일자진(一字陣)이라는 전법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장사진(長蛇陣)은 함대를 앞뒤로 길게(長) 한 줄로 늘어서게 하여 마치 뱀(蛇)과 같은 대형으로 적을 공격하는 전법을 말하고, 일자진(一字陣)은 배들이 옆으로 길게 한 줄로 늘어서서 돌격하며 포를 쏘아 적을 물리치는 전법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 때마다 그에 맞는 전법(戰法)을 사용하여 적군을 물리친 것이다. 또한 우리 해역 사정에 적합하도록 배 바닥을 평평하게 만든 평저(平底) 형태 전선(戰船)의 우수성도 승리에 한몫을 했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단 12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왜군 함대에 맞서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병법(兵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명이 겁을 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순신 장군의 말과 행동에 군사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굳은 의지로 전투에 나설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용기가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유례가 없는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이 백전백승의 승리를 거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순신은 나아가 바다 전장(戰場)을 치밀하게 연구해 명량해협에서 적을 저지·격파하려는 전술을 세웠다. 하지만, 병력과 군함 수, 그리고 화력 등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선 수군이 막강한 일본군에게 승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직 죽을 각오로 싸울 때라야만 기적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결사의 각오가 현실화되면서 세계사에 기록된 해전,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