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유도원도는 외출 중? 3편
■ 몽유도원도는 외출 중(?) 3편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자, 안평대군의 별서(別墅)였던 무계정사(武溪精舍)도 즉시 철거되면서 몽유도원도를 포함한 많은 장서를 경기도 고양현의 대자암(大慈庵)으로 황급히 옮기게 되었다. 대자암(大慈菴)은 세종의 동생인 성녕대군 이종이 13세에 요절하자, 아버지 태종이 그 무덤 옆에 1418년 4월 4일 지은 재암(齋菴)인데,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져 그 자리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구가 서울에 입성한 후, 남별궁에 주둔한 총대장 평수가(平秀家)가 이 절에 보관하던 장서(藏書)와 금불(金佛)까지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일본에 반출하게 되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때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몽유도원도’는 지금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31년, 동경 우에노 미술관의 전람회에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출품되었다. 간송(澗松) 전형필 선생은 당시 3만원에 이 그림을 판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3만원이면, 서울에 있는 기와집 30채 값이었다고 하는데, 간송은 일단 계약금을 걸어두고 이 그림을 사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 전형필 선생은 상중(喪中) 이어서, 탈상 때까지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말고 유산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금기 때문에 전형필(全鎣弼) 선생은 그만 그림을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이 일은 간송에게도 매우 아쉬운 상처로 남게 되어 이후 ‘몽유도원도’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10여 년 전, 우리나라에서 잠시 특별전을 열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몰려들어 한 사람당 30초씩 관람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는 이 작품을 다시는 전시하지 않겠다고 했다하니, 앞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우리의 문화재인데..............안타까운 현실이다.
긴 외출을 마치고 하루속히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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