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령왕릉 2편
■ 무령왕릉 2편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의 키가 8척이나 되고 인자하며 너그러워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흥 귀족 세력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던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권을 튼튼히 했으며, 지방에 왕족이나 충성스러운 신하를 관리로 파견하여 다스리는 담로 제도를 실시해 전국을 안정시켰다. 또한 무령왕은 수리 시설을 정비하여 농사 활동을 돕고, 국방을 튼튼히 하는 한편 일본이나 양나라와 친밀한 관계를 다지기도 했다. 그리고 고구려와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는 등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 매우 큰 혼란에 빠져 있었으며,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백성들의 삶도 피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무령왕은 고구려의 남하에 맞서 국방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려 노력하였다.
그의 재위 기간에는 흉년이 자주 들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만으로도 502년(무령왕 2년), 506년(무령왕 6년), 521년(무령왕 21년)에 홍수와 가뭄, 전염병, 메뚜기 떼의 창궐 등으로 백성들이 크게 굶주렸다고 나타나 있다. 무령왕은 창고를 열어서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한편, 510년(무령왕 10년)에는 왕명으로 하천의 제방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도회지로 몰려든 유민들을 농촌으로 보내 농사를 짓게 하였다. 백성들의 유랑(流浪)은 세수(稅收)의 감소 뿐 만 아니라 인력 동원 등 여러 면에서 국력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에 무령왕은 적극적인 민생구제정책으로 농민층의 안정을 추진하여, 국가재원의 확보로 이어지는 경제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대민정책은 한강 유역의 상실 이후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고 농업생산의 증대를 도모하여 정권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백성들의 안정을 통해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고자 한 것이다.
도굴이 어려운 구조인 신라 왕릉과 달리, 백제 왕릉은 출입구가 따로 존재하고 돌무지로 덮혀 있지도 않은 굴식 돌방 또는 벽돌무덤 양식이었으므로, 백제가 멸망한 이후 거의 도굴(盜掘)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무령왕릉처럼 도굴을 피해 거의 온전하게 남아있는 건 한국판 투탕카멘급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무령왕릉은 무덤이 통째로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도굴과 일제강점기의 약탈에도 온전하게 발굴되어서 전국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이유이다.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 중 5호분과 6호분의 침수를 방지하기 위해 배수로 작업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어 무려 1400년 만에 그 베일을 벗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무령왕릉은 중국 육조(六朝)의 전실분(塼室墳) 형식을 띤 연화문(연꽃무늬) 벽돌로 아치를 쌓은 아치형 벽돌무덤이다. 백제 고분으로서 전축분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은 당시 중국 남조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이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종 2,906점의 장신구와 유물로, 지금까지 발견된 어떠한 발굴보다도 원형을 잘 간직한 백제 시대의 것들이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