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령왕릉 4편
■ 무령왕릉 4편
지석에 따르면 무령왕은 사마라는 이름을 썼다. 동성왕의 아들로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일본 지역을 다스리던 사마왕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귀족 세력을 제압하고 백제 부흥을 위해 애썼다. 이는 백제의 지배력이 일본에까지 미쳤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2001년 12월, 전(前) 일왕 아키히토(明仁)가 던진 한마디가 일본 사회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아키히토 일왕은 “나 자신도 간무(桓武)왕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낍니다.” 라고 했다. 말하자면, 일왕의 가계(家系)가 한국에서 왔다는 고백이 되는 것으로 일본 사회에 크나큰 파장을 던졌다. 2004년 8월에는 그런 이유로 아키히토 전(前)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가 방한(訪韓)해서 무령왕릉을 참배하고 일본에서 가져온 제사물품을 기증한 바 있다.
",안타깝게도 무열왕릉은 이런 역사적·학술적 가치와 대비되는 어처구니없는 졸속 발굴 때문에 ‘사상 최악의 발굴’로도 알려져 있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당시 ‘하룻밤 삽질로 이루어진 도굴 수준의 발굴’이라고 비판받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1년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발굴의 총책임자이자 현장책임자였던 작고(作故)한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 선생은 발굴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발굴대원들은…철야작업을 해서라도 발굴을 속히 끝내기로 합의했다. 철조망을 돌려치고,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눌러앉았어야 할 일이었다. 몇 달이 걸렸어도 그 나무뿌리들을 가위로 하나하나 잘라서 장신구들을 들어냈어야 했다. 고고학 발굴의 ABC가 미처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예기치 않던 상태의 흥분 속에서 내 머리가 돌아 버린 것이다.”
도굴이 한 번도 되지 않은 귀중한 왕릉의 발굴이었지만, 보통은 몇 년은 걸릴 법한 발굴 조사를 17시간, 겨우 하룻밤 만에 해치워버린 것이다. 비록 유물은 다 챙겼지만, 유물만큼이나 중요한 유물의 배치를 비롯한 현장 사진과 기록이 너무나도 부실했다. 남아있는 자료는 급하게 끝낸 부실한 실측자료와 약간의 사진, 그리고 사진 기자들의 학술적인 가치가 결여된 사진뿐이었다. 희대의 발굴을 취재하던 기자들 역시 유물이 발견되자, 어떻게든 내부로 들어가 사진을 찍으려고 일부는 책임자를 폭행하고 유물을 파손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현장이 이렇듯 전혀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계자들은 유물이 도난 될 수도 있다는 조급한 마음에 기록도 없이 유물을 자루에 쓸어 담아버렸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