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정왕후 2편
■ 문정왕후 2편
사화(士禍)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윤임(尹任)을 사사한 직후 경기도 관찰사 김명윤이 윤임 일파(대윤)가 윤임의 조카인 계림군 이유(李瑠:월산대군의 손자로 장경왕후의 조카)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모의를 했다고 모함했다. 계림군 이유(李瑠)는 행실이 바르고, 호학(好學)하는 군자(君子)라고 왕족 중에서도 명성이 자자했고, 서자(庶子)였으므로 왕위에 오를 꿈도 꾸지 않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림(士林)을 제거할 좋은 기회로 본 소윤파는 이를 역모 사건으로 확대 조작했다. 즉시 체포령이 떨어지자 겁을 먹은 계림군이 도망치는 바람에 역모는 사실인양 되어버렸고, 계림군과 함께 교유했던 인물들과 윤임(尹任)을 사사(賜死)할 때 반대했던 신하들이 줄줄이 엮여 잡혀와 모조리 참형에 처해졌다.
아무튼 을사사화 이래 윤원형 일파인 소윤은 수년간 반대파 숙청을 위한 음모를 계속하였는데, 이 때까지 죽은 유력 인사들만 해도 100여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의 총감독은 당연히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는 죽는 날까지 국정을 장악하고 철혈정치를 펼치니, 실로 대단한 여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정왕후를 야사(野史)는 아주 표독스러운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정사(正史)인 실록에서도 야사 못지않게 부정적인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문정왕후가 사화를 통해 사림을 탄압함으로써 당대 유학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사관(史官)이 모두 유학자였던 점과 문정왕후가 사림파를 신임했던 인종을 배척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점, 그리고 유학자들이 결사반대하는 불교를 부흥시킨 점 등이 그 원인일 것이다. 또, 시대가 시대인 만큼 여기에 ‘여자’ 라는 이유가 부정적인 평가를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중종대 후반부터 세자인 인종을 견제하면서 자기 소생인 명종의 즉위를 이끌어낸 문정왕후. 그녀는 아들을 대신해 수렴청정의 방식으로 국정의 최고 위치에 섰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 문정왕후는 윤원형, 정난정과 함께 외척정치의 전성시대를 열었고, 권력유지를 위해 반대파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