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정왕후 3편
■ 문정왕후 3편
1545년 을사사화에 이어 벌어진 1547년의 ‘양재역 벽서(壁書)사건’으로 인해 사림파는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547년(명종 2년) 9월 18일의 《명종실록》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문정왕후를 ‘여주(女主)’라 조롱하고, 그 아래에서 이기 등이 권세를 농간하고 있다는 벽서의 파장은 컸다. 중종의 아들(서자)인 봉성군 등 3명이 역모 혐의로 처형되는 등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또 사림파의 중심 이언적, 백인걸,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갔다. 윤원형은 독재 권력을 유감없이 휘두르며 반대파의 씨를 말렸다.
상황이 계속 심해지다 보니 1555년 조식은 상소문을 올려 명종을 고아, 문정왕후를 과부로 표현하면서 나라가 심각한 위기 상태임을 지적했다. 1559년부터 3년간 전국을 휩쓴 임꺽정의 출현도 외척정치의 결과물로 농민 생활이 파탄에 이르렀음을 말해 주는 사건이었다.
문정왕후는 민생은 외면한 채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했다. 불교 중흥 정책이 대표적이다. 1550년(명종5년) 12월 문정왕후는 친서를 내려 선종과 교종 양종의 복립(復立)을 명하면서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本寺)로 삼았다. 사찰이 일방적으로 빼앗겼던 토지를 반환하게 하고, 연산군 때 폐지된 승과 제도까지 부활시켰다. 조선이 취한 불교 탄압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른 정책이었던 만큼 신하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서 동맹휴학으로 맞섰지만 문정왕후는 뚝심 있게 불교 중흥을 추진했다. 특히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보우는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되어, 보우를 죽이라는 장계가 75건이나 올라올 정도였다.
현재 서울 강남의 최대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는 봉은사는 450년 전 문정왕후가 보우와 함께 불교 중흥의 꽃을 피워보려 했던 공간이었다. 당시 사관들은 이렇게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정책을 비판했다.
『이때 세자(순회세자)를 잃자 요승 보우가 복을 기원해야 한다는 말을 떠벌려 무차대회(불교 법회의 한 종류) 베풀기를 청했는데, 문정왕후가 그 말에 혹해 그대로 따랐다. 승려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였으며, 조각이나 장식을 극도로 화려하게 해 옛날에도 보지 못하던 정도였다. (중략) 또 배위(拜位)를 마련해 마치 왕이 부처에게 배례하게 하는 것처럼 했으니, 그 흉악함과 패악을 형언할 수 없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