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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 일요일

미모의 후궁 백야단

■ 미모의 후궁 백야단

■ 미모의 후궁 백야단

백야단(白也丹:?~1297)은 태산군(泰山郡:현재 전북 정읍) 사람인 시씨(柴氏)의 딸로서 처음에 궁인(宮人)으로 입궁하였다가 충렬왕의 후궁이 되었다. 무비(無比)라고도 불리는데, 무비란 비교의 대상이 없다는 뜻이니 매우 아름다웠을 것은 짐작이 간다. 예전 의종(毅宗)의 궁인 중에도 무비가 있었는데, 그녀 역시 미모로 왕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백야단을 무비라고 부른 것은 미색(美色)과 왕의 총애가 예전의 무비 못지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성격도 상당히 자유분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미색을 무기로 여러 남자들을 꼬드겨 간통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충렬왕은 세자 시절에 종친의 딸인 정화궁주(貞和宮主)와 혼인했고, 1274년(원종 15) 39세 때는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였다.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과 나이가 20살 이상 차이 났지만 원나라 공주라는 것 때문에 그 위세가 왕을 능가할 정도였다. 게다가 질투도 매우 심해 정화궁주조차 제국대장공주가 죽을 때까지 왕과 동거를 못하고 별궁(別宮)에 기거할 정도였다.

충렬왕은 공주의 질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라산(都羅山·경기도 파주시 소재)으로 사냥을 갈 때면 반드시 백야단(무비)을 데리고 갔고, 한 번 가면 며칠씩 놀며 밀회를 즐겼다. 왕의 총애가 두터워지자 자연스레 많은 사람들이 그녀 주위에 몰려들었고, 그녀의 세력을 등에 업고 여러 가지 부정과 부패를 저지르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자 원(謜)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충렬왕 23년(1297년) 음력6월 세자 원(謜)은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충렬왕의 妃)가 사망하자, 상(喪)을 치르기 위해 원에서 고려로 귀국하였다. 제국대장공주의 병사(病死)가 후궁의 투기 때문이라며 이를 조사할 것을 건의하였다. 충렬왕은 상중(喪中)이니 기다릴 것을 명하였으나, 세자 원은 측근에게 명하여 무비(無比)와 그 일당인 환관 최세연, 도성기, 전숙, 방종저, 중랑장 김근(金瑾), 궁인 백야진 등을 체포하고, 무비가 무당을 시켜 제국대장공주를 저주한 일을 문초하였다. 결국 저주에 가담한 무녀와 승려가 자백을 하면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다.

같은 해 음력 7월, 무비와 최세연, 도성기, 전숙, 방종저, 김근, 백야진은 참수되었고 일당 40여명이 유배되었다. 즉 세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빌미로 충렬왕의 측근 세력을 제거했던 것이다. 백야단의 사례는 후궁들이 중요한 정치세력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세자 원은 무비를 죽인 뒤 충렬왕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진사 최문(崔文)에게 시집갔다가 과부가 된 김양감의 딸(훗날의 숙창원비)을 왕에게 바쳤다. 음력 10월, 세자는 원나라로 돌아갔는데, 충렬왕은 결국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줄 것을 허락하도록 원나라에 요청하였다. 마침내 세자는 이듬해 정월에 귀국하여 즉위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충선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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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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