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 김구 2편
■ 백범 김구 2편
당시 미국의 최대 적은 소련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이런 미국에게 한반도 내 공산당까지 아우르며 통일 대한민국을 만들려 했던 백범과 임시정부가 반가울 리 없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반가운 인물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미국에서 다양한 정치활동과 외교활동을 펼친 이승만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무자비한 공격에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았던 임시정부와는 달리,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운 미국에서 미국식 의회민주주의를 공부한 이승만은, 일본을 공격하는 것보다 식민지 한국의 사정을 외교로 알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그의 눈에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는 순간의 감정을 못 이기고 행한 테러 행위로 비쳤을 지도 모른다.
백범과 이승만은 과거 상해 임시 정부에서 초대 대통령과 경무국장으로 만난 이후 26년 만에 다시 서울에서 만났다. 당시 신탁통치문제 등의 복잡한 정세에서 이승만은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백범은 시간이 걸려도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서로 엇갈렸다.
김구는 1948년 2월에 통일정부수립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남북협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북행길에 올랐다. 4월20일 평양에 도착한 백범은 23일에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연설을 하고, 4월26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된 남북요인회담에서 외국 군대의 동시철수와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 등을 결의해 공동 발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5월5일 서울로 돌아와 남북통일에 대한 희망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48년 8월에 남한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에는 9월에 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각각 수립되어 분단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백범이 친일파를 철저히 색출해서 제거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내세운 반면, 이승만은 친일 행위를 한 인물들을 대거 등용하기 시작했다. 나치의 통치기간 동안 친독 행위자 수천 명을 처단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친일파들에게 관대했던 이승만의 정책에 백범은 강하게 반대 했다.
결국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는 당시 육군 소위 안두희(1917~1996)의 흉탄에 맞아 조국 통일의 강렬한 염원을 간직한 채, 경교장(김구의 사저)에서 서거하고 말았다. 그가 서거한 지 정확히 1년 후인 1950년 6월25일 백범의 예견처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씻지 못할 상처를 우리에게 남겼고 아직도 우리는 분단된 나라에서 살고 있다. 참으로 찬타까운 일이다. 서거 40여년 만에 이루어진 국회 조사활동에서 이 암살사건은 안두희의 우발적인 단독 범행이 아니라, 당시 군 수뇌부에 의한 정권차원의 범죄임이 밝혀졌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