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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3일 수요일

백제 성왕 2편

■ 백제 성왕 2편

■ 백제 성왕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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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 천도 후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하여 부여의 정통 후손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알다시피 백제는 고구려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세력이 세웠고, 또 고구려는 부여에서 내려온 세력이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백제 나름 새로운 분위기와 문화의 창조를 위한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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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은 백제의 힘을 더 키우기 위해 남쪽에서 세력을 넓히던 가야 땅의 일부를 차지하며 계속해서 가야를 압박했다. 성왕은 사비에서 나라를 새롭게 꾸미려고 노력했다. 우선 중앙에 22개의 관청을 만들어서 각 부서가 맡은 일을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했다. 수도는 5부, 지방은 5방으로 나누어서 왕의 명령이 지방에까지 잘 전달되도록 체계적인 행정 체계를 만들었다. 이는 모두 왕권을 강화시키고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 운영에 있어서 귀족 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또한, 백제는 중국 특히 남조와 교류하면서 문화 수용에 힘썼는데, 침류왕 때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불교를 온 백성들이 믿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했을 뿐 아니라, 발전된 백제의 불교문화를 일본에 전해줌으로써 대일관계에서도 특별한 족적을 남겼다.

왕권이 확립되고 불교문화를 꽃피우며 중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을 되찾을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성왕은 국제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온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꾸준히 이어나감으로써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중국 남조의 양(梁) 및 왜(倭)와의 외교 관계를 지속하는 한편,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 교류 역시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더욱 높였다. 그래서 동맹을 맺은 신라와 함께 이전에 고구려 장수왕에게 뺏겼던 한강 유역을 되찾게 되었다. 하지만 성왕의 기쁨도 잠시, 한강 유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신라의 진흥왕은 성왕을 배신하고 한강을 독차지했다.

본시 고구려를 확실히 눌러서 백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는 것은 신라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고, 신라는 강력해진 백제를 원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백제가 삼국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백제 성왕은 신라의 진흥왕을 주시하면서 경계했어야 했다. 그런데 성왕은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 스스로를 백제를 30년간 통치해온 경험 많고 노련한 성공적인 임금으로 자신감이 넘쳤던 것 같다. 당시 신라 진흥왕은 이제 나이 약관도 안 된 애송이이며, 실제 국정을 맡은 지도 얼마 안 된 설익은 임금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