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방사우文房四友 - 종이, 붓, 먹, 벼루의 네 가지 문방구
문방사우(文房四友) - 종이, 붓, 먹, 벼루의 네 가지 문방구
글월 문(文/0) 방 방(戶/4) 넉 사(口/2) 벗 우(又/2)
文房(문방)은 학용품과 사무용품 등을 파는 문방구도 되지만 서적을 갖추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서재를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은 기품 있는 풍류를 즐겨 詩書畵(시서화)를 중요시했기에 문방에는 항상 글과 그림을 그릴 종이 붓 먹 벼루 등 四友(사우)를 갖추고 있었다. 이것을 한꺼번에 칭해 紙筆墨硯(지필묵연)이라 하기도 하고 文房四寶(문방사보)나 文房四侯(문방사후)로 높여 부르기도 한다. 사후는 이들을 의인화시켜 벼슬이름을 붙인 것인데 붓은 管城侯(관성후), 벼루는 墨侯(묵후), 종이는 好峙侯(호치후), 먹은 松滋侯(송자후)로 불렀다고 한다.
먼저 종이는 기록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다. 문자가 발명되고도 상대에 전달하려면 필수적인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돌이나 나무, 대나무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의 기원은 서양에서는 이집트 나일강 주변 지중해 연안에서 자생하는 파피루스(papyrus) 속을 말린 것을 친다. 동양에서는 중국 後漢(후한)시대의 환관 채륜이 105년 만든 종이를 蔡侯紙(채후지)로 부르며 오늘날 한지의 선행형태이자 완성형으로 보고 있다.
문자가 보급되고 바탕이 되는 종이가 있다면 그곳에 쓸 필기구가 필요하다. 붓을 말하는 筆(필)의 글자를 보면 원래의 붓을 뜻했던 聿(율)의 위에 대 竹(죽)이 있다. 대나무를 재료로 秦(진)나라 때 처음 蒙恬(몽염)이 만들었다고 한다. 竹簡(죽간)에다 금으로 만든 칼로 글을 새기는 것이 직업인 刀筆吏(도필리)로 漢(한)의 劉邦(유방)을 도왔던 蕭何(소하), 曹參(조참) 등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연유이기도 f하다. 그 뒤 짐승의 털을 추려서 모아 대나무 관에 고정시킨 붓으로 발전했다. 붓끝의 가는 털을 毫(호)라고 하는데 毫釐(호리)라 하면 매우 적은 분량을 가리킨다.
먹은 종이와 같이 후한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五代十國(오대십국)의 後周(후주) 때 먹의 사용을 권장하여 李廷珪(이정규) 같은 유명한 墨工(묵공)을 배출했다. 고구려의 曇徵(담징)이 일본에 불법을 강론하고 610년 종이와 함께 먹도 전래하여 매우 귀중한 문방으로 여기고 있다.
대개 돌로 만드는 벼루는 瓦硯(와연), 陶硯(도연) 외에 보석까지 다양하고 형태도 직사각형에서 타원형까지 독특한 의장도 많다. 먹을 가는 부분이 硯堂(연당), 먹이 모이는 오목한 곳이 硯池(연지)다. 좋은 조건으로는 첫째 먹이 잘 갈리고 고유의 묵색이 잘 나타나는 것을 친다. 오늘날 서예 외에는 사우를 사용하는 일은 드물다. 먹과 벼루는 물론 종이와 펜도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는 시대에 옛날 물품이 되고 있다. 지필묵연의 기품 있는 문예가 한꺼번에 일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다. / 글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