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붕당정치朋黨政治 3편
■ 붕당정치(朋黨政治) 3편
1589년 정여립이라는 신하가 반란을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도망을 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벌어졌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의 편에 있었다가 나중에 동인의 편에 서서 서인을 비판했던 인물이었다. 정여립 역모 사건의 처리는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정철이 맡았는데, 정철은 사건을 확대하여 동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1591년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인이 힘을 잃자, 반대로 동인들은 힘을 얻게 되었다. 정철의 처벌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로 동인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뉘게 되었다.
동인 중 이산해와 이발 등은 "정철을 죽이고 서인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폈고, 유성룡과 우성전 등은 "정철은 유배 보내고 서인들 중에서도 인재는 조정에 등용해야 한다"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주장을 폈다. 이 일로 인해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산해와 이발을 따르는 강경파들을 북인이라고 불렀는데, 이산해의 집이 한강 북쪽이었고 이발의 집이 북악산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온건한 주장을 했던 유성룡과 우성전을 따르는 사람들은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인과 남인은 학파에서도 조금 차이가 있었다. 원래 동인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 출신들인데, 북인은 그중에서도 조식과 서경덕의 제자들이 중심이었고, 남인은 이황의 제자들이었다. 결국 정철은 온건한 남인들의 주장대로 유배형으로 결론이 났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북인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다. 북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한 정철을 비판하고 강력한 처벌을 주장했었는데 어떻게 광해군의 신임을 받았을까? 북인 중에는 광해군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사람(소북파)도 있었지만 광해군을 지지한 사람(대북파)도 있었다. 광해군은 북인(그 중에서도 대북파)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1623년에 서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 능양군이 왕이 되면서 다시 세력의 중심은 서인에게 넘어갔다. 이 때 남인들은 서인들과 뜻을 함께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