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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1일 일요일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4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4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4편

실록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대한 자료가 동원되었다. 그 가운데 사관들이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사초(史草)는 실록 편찬의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사초에는 입시사초(入侍史草)와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있다. 입시사초는 전임사관이 왕 가까이에서 나랏일을 기록한 사초이고, 가장사초는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정리하여 기록한 사초이다. 따라서 가장사초는 입시사초에 비해 글씨도 알아보기 쉽고 내용도 정리가 잘된 편이다. 가장사초는 사관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정해진 기일에 실록청에 제출하여 편찬의 자료로 사용되었다. 사관은 가장사초에 자신이 직접 들은 사건과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기록하였다. 그래서 실록에는 ‘사실’과 함께 ‘비평’이 담겨 있다.

입시사초는 겸임사관들이 작성한 춘추관일기와 함께 시정기(時政記)로 만들어져 실록 편찬의 일차 자료가 되었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실록을 만들기 위한 기본 자료이기에 가장 필수적이지만 특히 조선시대의 사초는 사관 외에 왕도 볼 수 없게 함으로써 사관의 신분과 역사 기록의 객관성이 확보될 수 있었다.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 외에도 각 관청의 등록·승정원일기·경연일기·일성록 등과 개인 문집·야사 등도 수집하여 실록 편찬 자료로 활용하였다. 실록 편찬에 쓰이는 이 모든 자료를 통칭하여 사초(史草)라 부르기도 한다.

실록이 완성되면 총재관 이하 편찬에 종사했던 관리들이 참석하여 실록을 궤를 가마에 싣고 춘추관으로 나아가 성대한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지방의 사고(史庫)에 봉안할 경우 왕명을 받들어 소임을 맡은 관리와 종사관 몇 명만이 실록을 싣고 가 사고에서 의식을 거행한 후 봉안하였다. 한편 실록이 완성되면 초초(初草)와 중초(中草)는 개천물에 씻어 내용을 지우고 종이는 바위에 말린 후, 종이 제작을 담당했던 관서인 조지서(造紙署)로 보냈다. 사초를 씻어 내는 일을 세초(洗草)라 하였는데, 실록의 내용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과 종이 재활용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세초는 당시 조지서와 가까웠던 세검정의 개천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차일암(遮日巖:차일을 쳤던 바위)이라 불린 넙적 바위에서 종이를 말렸다. 차일을 치는 이유는 햇볕을 가리기 위한 원래의 목적보다 기록의 누설을 막기 위한 철저함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세초가 끝나면 수고한 관리들을 치하하기 위한 세초연(洗草宴)이 베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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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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