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세자의 죽음 1편
■ 사도세자의 죽음 1편
1762년(영조 38년) 5월의 어느 날 형조에, 세자가 내시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서가 올라온다. 고변서를 올린 나경언을 친국(親鞫)하는 과정에서 세자의 비행이 폭로되었다. 잦은 궁 밖 출입, 왕손을 낳은 애첩을 죽인 일, 기생과 승려를 도성 안으로 불러들인 일, 낭비벽 등등. 영조는 고변한 나경언을 사형에 처하고, 자신의 아들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강등하는 한편, 윤 5월 땡볕에 뒤주를 내놓고 그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 뒤주에 갇힌 세자는 9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다가 뒤주 속에서 결국 죽고 만다.
왜 영조는 사도세자를 이처럼 비참하게 죽였을까?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남편의 정신병 증세와 광폭한 행동을 적고 있다. 그렇다면 영조는 정신병을 앓는다는 이유로 사도세자를 죽였을까? 세자 자리에서 쫓아내거나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100일이 지나자마자 유모와 나인들 품에서 성장하였다. 자라면서 세자는 부왕인 영조에 대한 험담을 자주 들었고, 책보다는 창과 활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학문적으로도 영도의 기대치에 못 미치게 되면서 영조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영조는 활달하고 민첩한 성격이고 세자는 말이 없고 행동이 꿈 떠, 영조는 매사에 그런 세자가 못마땅했다. 영조는 스스로도 자신의 성격이 몹시 편협하고 조급하다고 시인할 정도였다. 자녀에 대해서 편애가 비정상적으로 심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자식과 미워하는 자식이 한 자리에 있는 것조차 못견뎌했다. 가끔 이루어지게 되는 세자와 영조의 만남은 항상 영조가 세자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끝이 났고, 시간이 흐를수록 세자는 영조를 몹시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도세자가 15세 되던 해, 영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면서 그 관계는 한층 더 악화되었다. 일을 처리할 때마다 영조의 눈치를 살펴야했고, 결국 정신적 압박으로 ‘화병’에 걸리고 말았다. 20세를 전후해서는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정신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거나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주장인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세자를 정신병자로 몰았고, 영조 역시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 이었다’ 고 하면서 모든 원인과 책임이 세자에게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