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세자의 죽음 2편
■ 사도세자의 죽음 2편
사도세자는 과연 아버지와의 갈등에서 오는 정신적 압박감으로 광인(狂人)이 되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로 정신병자로 몰렸던 것은 아닐까? 정치적인 이유는 아니었을까?
영조의 아버지 숙종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나 장성한 왕자는 후에 경종이 된 세자와 연잉군(영조) 단 두 명이었다. 이복형인 세자는 생모 장희빈이 숙종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왕위를 계승하기에는 건강이 약해 세자이면서도 왕위계승자로서의 위치가 견고하지 못했다. 경종은 생모 장희빈의 친정집을 중심으로 한 소론의 지지를 받았고, 장희빈의 죽음으로 복위한 인현왕후를 등에 업고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은 세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잉군(영조)을 공공연히 왕위계승자로 거론하였다. 연잉군(영조)은 정쟁(政爭)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소심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복형인 경종은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얼마 있지 않아 후사 없이 죽고, 노론의 주장으로 왕세제로 책봉되었던 영조가 노론의 지지를 받으며 즉위하게 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첨예한 대립을 조절하면서 정치적 안정을 꾀하기 위해 ‘탕평책’을 폈지만, 노론의 적극적인 지지로 왕위에 올랐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노론의 독주를 깨닫고 이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당시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이 정계로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노론에게는 자신들의 기반을 흔드는 위기였다. 따라서 노론은 사도세자를 제거해야만 했다.
영조의 입장에서도 자신의 생모가 비천한 신분이었던 데 대해 늘 자격지심이 있었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일부 세력(소론)에 의해 경종 독살 의혹을 받았음을 의식하면서 심리적으로도 늘 불안했다. 이에 소론과 놀아나는 세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은 물론 자신을 지지하는 노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영조는 세자가 죽은 후,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지위와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다.
왜 그랬을까? 애원하며 죽어가는 아들을 외면했고, 아비를 살려달라는 세손(정조)의 눈물도 외면했던 그가. 이는 다음 왕위를 이을 세손(정조)을 보호하여 왕실의 안녕을 지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