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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9일 금요일

사육신死六臣 2편

■ 사육신死六臣 2편

■ 사육신(死六臣) 2편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쥔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부사·이조판서·병조판서·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하면서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독차지한다. 수양대군은 권람·한명회·홍달손과 간접적으로 도운 정인지·한확·최항·신숙주·성삼문 등 43명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봉했다. 이어서 형식상 단종으로부터 선양(禪讓)의 절차를 밟아 왕위에 오름으로써 세조의 시대가 열렸다.

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이 정난공신에 봉해진 이유는, 이들이 유교에서 말하는 다수의 유학자가 참여하고 공론을 실현하는 신하중심의 정치운영을 이상으로 여겼으므로 소수 재상을 중심으로 한 정치운영에 불만을 느껴, 수양대군의 정적제거에 동참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조의 집권은 집현전 출신 유학자들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의정부서사제도(의정부의 3정승이 논의하여 합의된 것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를 폐지하고 6조직계제(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과 실무를 담당하는 6조가 바로 연결)를 실시했다. 이는 의정부의 권한 약화와 왕권 강화를 통해 국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운영을 실현하겠다는 뜻이다. 집현전 출신의 관료들은 즉시 반대했다. 이들은 정치운영을 국왕 한명에게 맡길 수 없고, 대다수 관료가 참여하는 신하중심의 정치운영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하고 정국은 세조의 독주로 나아갔다.

이에 세조의 잔인한 왕위 찬탈과 왕권 강화에 불만을 품은 유학자들은 세조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폐위된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도모하게 되었다. 단종복위의 명분은 세조의 불의와 왕위찬탈에 대한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운영을 둘러싼 신권과 왕권의 대립과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집현전 출신 유학자가 참여한 이 계획은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가 중심이 되어 진행됐다. 이들은 집현전을 모의 장소로 정하고 여러 차례 의논한 결과, 1456년(세조2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낌새를 눈치 챈 한명회의 주장으로 연회 절차에 변동이 있게 되자 박팽년과 성삼문의 결정으로 거사가 미루어졌다. 이때 불안을 느낀 김질(金礩)이 장인인 정창손에게 알렸고, 정창손은 다시 세조에게 알렸다. 정창손의 고변(告變)을 들은 세조는 분노했다. 세조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였고 거사는 실패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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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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