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육신死六臣 3편
■ 사육신(死六臣) 3편
세조는 이들의 국문에 직접 나섰고, 잔인한 고문도 자행되었다. 이들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모두 절개를 지켰고, 오히려 세조와 추국관(推鞫官)인 신숙주를 꾸짖었다.
태어날 때 하늘로 부터 " 태어났느냐? 태어났느냐? 태어났느냐?" 3번 물음이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성삼문(成三問)은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라는 세조의 물음에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요.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고 나의 군주가 폐위 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요.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요"
성삼문의 당찬 말에 화가 치민 세조는 쇠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게 했다. 단근질과 인두질 등 잔인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왕으로 대하지 않았다.
박팽년은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박팽년은 단종복위운동으로 가문이 거의 멸문(滅門)을 당해 문집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박팽년은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성삼문이 함께 후일을 도모하자고 만류해 단념한다. 박팽년은 이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복위운동을 마음먹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조는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채, 재주 많은 박팽년을 매우 총애하고 있었다. 관찰사로 나가있던 박팽년을 다시 불러 형조참판에 임명할 정도로 자기 곁에 두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세조는 박팽년만큼은 죽이기가 싫었다. 박팽년에게 조용히 사람을 보내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박팽년은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세조는 박팽년도 잡아들였지만, 국문장에서도 박팽년을 회유했다. 그러나 박팽년도 세조를 부를 때 ‘나으리’라고 하여 세조의 분을 돋구었다. 정말 총애했고 옆에 두고 싶어 했던 박팽년이 세조를 조롱하듯이 계속 ‘나으리’라고 부르자,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세조가 “네가 이미 나에게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받아먹지 않았느냐!” 고 하였다.
이에 박팽년은 “나는 상왕(上王)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狀啓)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臣)이라고 하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臣)자는 하나도 없었고 신자 대신에 거(巨)자로 썼으며,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분기탱천한 세조는 가장 잔인한 방법인 단근질로 박팽년의 고문을 지시했다. 이에 박팽년은 단근질하는 쇠가 식었으니 다시 데워서 가져오라는 등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박팽년은 심한 고문 뒤 옥사하였고, 성삼문·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한 후 거열(車裂:사지를 찢어 죽임)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 당했고,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미리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결하였다. 한편 고발자인 정창손과 김질은 세조의 총애를 받아 영의정, 좌의정까지 올랐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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