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육신死六臣 5편
■ 사육신(死六臣) 5편
세조는 복위사건의 책임을 물어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영월로 유배를 보내버렸으며, 친동생인 금성대군과 단종의 장인을 역모의 배후로 지목해 모두 죽여 버렸다.
그 뒤 사육신 문제는 시대가 변하고 점점 이 문제가 올바로 인식되어감에 따라 사육신의 신원(伸寃:억울한 죄를 풀어 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했다. 마침내 1691년(숙종17년) 150여년이 지나서야 역적이란 호칭을 떼고 이들의 관작(官爵)과 명예가 회복되었다. 사육신을 정식으로 국가에서 공인, 복관(復官)시키고 묘우(廟宇)를 만들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육신은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우리 국민들에게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사육신(死六臣)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생육신(生六臣)이 있었기 때문이다. 죽어서 충성을 다한 사육신(死六臣)이 있다면,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자 벼슬을 버림으로써 살아서 단종에게 충성을 다하고 절개를 지킨 여섯 신하를 말한다. 생육신(生六臣)은 이맹전(李孟專), 조여(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또는 권절(權節)을 말한다.
남효온은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날 때에 겨우 두 살밖에 안된 어린 아이였지만, 그 뒤 세조의 즉위를 불의로 얼룩진 찬탈 행위로 규정하고 세조를 비난하여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남효온의 〈추강집 秋江集〉에 나오는 육신전(六臣傳)에 언급된 사육신의 명단이 어디서 근거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 단종복위가 실패해 큰 문초를 당하고 단종마저 영월로 귀양 가 피살되자, 이 사건을 은밀히 동정하던 사람들에 의해 사육신의 이름이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을 문집에 수록한 것이 아닐까 한다.
"생육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김시습이다. 김시습은 3살에 이미 시에 능했고, 5살에는 <중용> <대학> 에 통했다고 알려진 조선의 천재이다. 김시습은 21세 때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 이라 짓고 방랑을 하다 죽었다. 김시습은 유교, 불교, 도교에 모두 통하였으며 재주와 지혜가 탁월하였는데, 아까운 천재 하나가 시대와 타협하지 못하고 스러져버린 것이다.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단편 소설집인 《금오신화》를 썼으며,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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