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직단社稷壇
■ 사직단(社稷壇)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신인 사(社)와 곡물 신인 직(稷)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종로구 사직동에 있다(사직동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유).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왼쪽)에 종묘가, 서쪽(오른쪽)에는 사직단이 대칭되게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종묘가 양 (陽)에 해당하는 사람人의 신주를 모신 곳이고, 사직은 음(陰)에 해당하는 땅의 신주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사직은 사단과 직단이라는 두 개의 사각형 제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쪽에는 사단이 서쪽에는 직단이 있다. 사직단의 제단이 사각인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전통적인 관념에 따른 것이었고,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원구단(圜丘壇:환구단)의 모양이 둥근 모양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네모반듯한 단의 4면에는 3층의 돌계단을 설치하였고 단상 네 귀퉁이에는 구멍 난 돌이 박혀 있고 큰 쇠고리가 꽂혀 있는데, 이는 제사 때 필요한 기둥을 세우고 차일을 치도록 설비하였던 것이다.
종묘는 서울에 하나만 있었으나, 사직은 지방의 각 군현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지방의 사직도 음(陰)의 방향에 배치했기 때문에 관아 건물의 서쪽에 자리했다. 서울의 사직 제사는 국왕이 주관했으나, 지방에 있는 사직 제사는 국왕 대신 지방의 수령이 주관 했다. 현재 규장각에 있는 조선 후기 지방 지도를 보면 지방 관아 근처에 있는 사직단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농업이 주된 산업인 조선시대에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신 사직은 서울과 지방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종묘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사직단의 사방에는 홍살문(紅箭門)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북쪽에만 3개의 문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신이 출입하는 곳이 북쪽이므로 북문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종묘에는 국왕의 신주가 계속해서 추가되었으므로 여러 번 건물이 증축해야 했다. 종묘의 증축이나 제도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종묘의궤’가 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 본이 전해진다. 반면 사직단은 1395년 완공된 이후 제도상 큰 변화 없이 그대로 내려져 왔고 임진왜란 때 불 탄 이후 한 차례 중건되었을 뿐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