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삼마태수三馬太守 - 세 마리의 말을 타고 부임하는 고을 태수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삼마태수三馬太守 - 세 마리의 말을 타고 부임하는 고을 태수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년 4월 1일 월요일

삼마태수三馬太守 - 세 마리의 말을 타고 부임하는 고을 태수

삼마태수三馬太守 - 세 마리의 말을 타고 부임하는 고을 태수

삼마태수(三馬太守) - 세 마리의 말을 타고 부임하는 고을 태수

석 삼(一/2) 말 마(馬/0) 클 태(大/1) 지킬 수(宀/3)

\xa0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 淸白吏(청백리)라 하면 黃喜(황희) 정승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어진 인품으로 三可宰相(삼가재상)으로 불린 황희는 18년간 재상을 지내면서도 집에 비가 샐 정도로 가난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통틀어 217명이 배출됐다는 청백리는 ‘사모 쓴 도적’이란 속담대로 탐관오리가 우글거렸던 중에 빛난다.

\xa0

청렴한 관리를 뜻하는 다른 말로 세 마리의 말(三馬)만 타고 오는 고을 수령(太守)이란 성어가 있다. 成宗(성종) 때의 문신으로 지방관에 부임하거나 전임할 때 늘 세 필의 말만 사용했다는 宋欽(송흠, 1459~1547)을 지칭하는 말이다.

\xa0

세 마리의 말만 이용했다는 것으로 청렴의 대명사가 된 것에는 당시의 제도를 살필 필요가 있다. 지방관이 이용하는 驛馬(역마)의 수를 관직에 따라 정해 두었다는데 대부분이 규정을 무시하고 7~8필을 동원하여 요란하게 부임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李肯翊(이긍익)이 야사에서 수집한 역사책 ‘燃藜室記述(연려실기술, 藜는 명아주 려)’에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xa0

송흠이 매번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할 때는 ‘새로 맞는 말이 세 필밖에 안 되었는데(新迎馬只三匹/ 신영마지삼필)’ 공이 타는 한 필과 모친, 부인이 한 필씩 탔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그를 삼마태수라 불렀다(時人謂之三馬太守/ 시인위지삼마태수)’ 고 했다.

\xa0

이런 곧은 성품의 송흠이 燕山君(연산군)의 폭정을 비판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났고 중종반정 후 복직했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全羅道(전라도)의 외직을 두루 역임하고 1538년 청백리에 뽑혔다고 한다. 말의 마리 수는 달라도 비슷한 고려 忠烈王(충렬왕)때의 崔碩(최석) 이야기도 있다.

\xa0

최석은 지금의 順天(순천)인 昇平(승평) 부사를 마치고 떠날 때 당시 관례로 고을 사람들이 말 일곱 마리를 바쳤는데 낳은 새끼까지 모두 여덟 마리를 돌려주었다. 그 후로 그 폐단이 없어졌다며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팔마비라 했다(州人 頌德立石 號八馬碑/ 주인 송덕립석 호팔마비)’.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에 실린 내용이다.

\xa0

중국에서는 청렴을 더 강조한 유명한 성어가 있다. 뇌물을 거절하며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四知三惑(사지삼혹), 백성의 생활에 피해를 준다며 아욱을 뽑고 베틀을 버린 拔葵去織(발규거직, 葵는 아욱 규) 등이 대표한다. 공직자의 필독서가 된 丁若鏞(정약용)의 牧民心書(목민심서)에는 더 엄중하게 가르친다.

\xa0

‘청렴이라고 하는 것은 목민관의 기본 임무이고, 모든 선의 근원이며, 모든 덕의 근원이다(廉者 牧之本務 萬善之源 諸德之根/ 염자 목지본무 만선지원 제덕지근).’ 공직자의 첫 번째 도리가 청렴이라 한 깨우침이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잘 지켜지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