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도읍지를 정하라 2편
■ 새 도읍지를 정하라 2편
태조는 개성을 떠난 20여 일 후 계룡산에 도착했다. 태조는 계룡산의 산수와 형세를 돌아보면서 조운(뱃길), 도로, 성곽 터를 신하들에게 살피게 했다. 또한 풍수학자 이양달 등에게 땅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고,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 태조는 계룡산을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하기 위해 매우 구체적인 조치를 취한 것이다.
태조는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지세를 살펴보고 무학대사의 자문을 구했다. 무학대사는 “능히 알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계룡산 도읍지가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계룡산을 도읍지로 결정한다. 태조 즉위 2년 차(1393년) 2월 13일의 일이다. 태조는 예문춘추관 대학사 김주 등 일부 신하들을 계룡산에 남겨서 도읍지 건설을 감독하게 하고 개성으로 돌아갔다.
태조는 2개월 후 계룡산을 중심으로 한 81개의 주현(州縣),부곡(部曲),향소(鄕所)의 행정구역을 개편함으로써 제도적으로도 조선의 도읍지가 확정되고, 공사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계룡산 도읍지는 10개월 후 운명이 바뀌게 된다. 그 운명을 바꾼 사람은 경기 좌·우도 관찰사 하윤이었다. 하윤은 태조가 계룡산을 답사할 때 동행하지 않았다. 그는 풍수학을 내세워 계룡산의 단점을 들추어냈다. 도읍은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 서, 북쪽과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물이 오랜 생명을 다해서 쇠하고 패망이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지로 적당치 않다고 상소를 올렸다.
태조는 계룡산을 도읍 후보지로 물색했던 권중화, 판삼사사 정도전, 판중추원사 남재 그리고 하윤으로 하여금 검증단을 꾸렸다. 검증단은 고려왕조 여러 능의 길흉(吉凶)을 조사했다. 그 결과 하윤의 주장과 일치했다. 태조는 새 도읍지 건설을 중지시켰다. 도읍을 옮기기 싫어했던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은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태조의 두 번째 도읍지 계룡산도 이렇게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태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태조 3년, 서운관의 모든 문서를 하윤에게 주면서 천도(遷都)의 땅을 다시 고르게 했다. 권중화, 정도전 등 핵심관료 11명에게 여러 현인들의 <비록(祕錄)>을 참고해서 요점을 정리해 바치게 했다. 또한 태조 자신도 신하들과 지리서인 <비록촬요>를 공부했다. 태조는 조준, 권중화, 하윤 등 11명과 서운관 관리 등을 무악(서울 서대문구)으로 보내 <비록촬요>의 내용과 부합하는지 지세를 살펴보게 했다. 일주일 후 이들은 현장을 돌아보고 와서 보고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