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색色을 탐한 양녕대군 1편
■ 색(色)을 탐한 양녕대군 1편
태종은 장남인 양녕대군을 많이 아꼈다. 조선 건국 이후 장자(長子)계승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태종 자신도 골육상잔의 비극을 맛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성리학에 근간을 둔 유교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자의 학문적 소양도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기에 태종의 세자에 대한 기대치가 클수록 양녕대군이 받는 스트레스는 더 커졌을 것이다.
양녕대군은 어린 시절 문무를 겸비하고 예능에도 능한 인물이었고, 태종의 정사를 일부 이양 받아 잘 처리했기 때문에 아예 왕의 자질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학문에 충실함은 물론 행동거지도 반듯하여 태종의 깊은 신임을 얻어가는 충녕대군에 비해 양녕대군은 세자교육에 대한 학업 스트레스로 점점 학문을 소홀히 하였고, 군왕(君王)이 되기 위한 세자수업의 압박을 잘 적응하지 못했다. 당시 세자의 하루 공부양은 열 시간도 넘었다고 한다.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양녕대군의 거짓말은 자꾸 늘어가고 태종에게 꾸지람을 듣는 횟수도 늘어났다. 양녕대군은 점점 태종의 눈 밖에 나면서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세종)의 사이도 멀어지게 되고, 양녕대군은 점점 더 삐뚤어져가기만 했다. 태종에게 심한 질책을 받게 되면 양녕대군은 많은 분량의 반성문을 바쳐서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양녕대군은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독특한 자유연애주의자였고, 스캔들을 일으키고 다니는 문제아였다. 양녕대군은 마음에 드는 여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마구 불러다 자신의 여자로 만들었다. 심지어 큰아버지의 애첩과 매형의 애첩까지 건드렸다.
양녕대군은 17살 때부터 기생들을 가까이 했다고 한다. 태종 10년(1410년) 중국 사신을 위해 베푼 연회에 불려 나온 기생 봉지련에게 흠뻑 빠졌다. 세자는 어린 내관 2명에게 봉지련의 뒤를 밟게 한 뒤 그 집을 찾아가 몰래 사통하고는 궁중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이것이 발각되자 태종은 세자의 명을 받아 봉지련의 뒤를 밟은 어린 내관 2명은 곤장을 치고 봉지련을 가둬버렸다. 세자는 이에 단식투쟁으로 버텼고, 태종은 세자의 건강이 걱정되어 봉지련에게 비단을 하사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1413년(태종13년) 세자의 비선 측근들이 평양 기생 소앵을 동궁(세자궁)으로 불러들였다. 태종은 관련자들을 문책하고 곤장을 쳤고, 심지어 세자의 스승인 변계량 등에게도 “대체 무엇을 가르쳤느냐” 고 문책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세자는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어머니인 원경왕후 민씨가 달래고 어르면서 당부의 말을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샤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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