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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8일 목요일

색色을 탐한 양녕대군 3편

■ 색色을 탐한 양녕대군 3편

■ 색(色)을 탐한 양녕대군 3편

세자는 태종 몰래 어리와의 밀애를 계속 즐겼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어리가 임신을 하게 되면서 그 존재가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태종은 노발대발하였다. 태종에게 호된 질책을 받고 어리까지 쫓겨나게 되자 자중을 해도 모자랄 판에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협박에 가까운 항의 서한을 보냈다. ‘왜 왕은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면서 자신은 한명의 어리도 거느리지 못하게 하느냐’고 따졌다. 그날 밤 결국 태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세자폐위를 발표하게 되었다. 처음엔 양녕대군의 아들을 세자로 올릴까 했었으나 후환이 생길까하여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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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캔들로 조정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어리가 사대부의 첩이라는 점이 도덕적인 면에서 큰 문제가 된 것이다. 결국 양녕대군을 도운 김한로를 유배시키고, 주변에서 세자의 비행을 도운 수발인력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폐위를 당한 양녕대군은 유배를 가게 되었는데, 양녕대군은 유배를 가서도 기생을 부르는 등의 망나니짓을 했고, 유배지에서 도망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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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예쁘다는 이유로 강제로 남편을 떠나 궁궐에 숨어 살았던 어리는 유배의 길에 올랐다가 이 상황을 비관하여 결국 스스로 목을 매고 자결을 하고 말았다. 왕실이 엉망이 되고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이르자 어리는 매우 자책하며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양녕대군의 여탐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말년에는 자신의 셋째 아들의 애첩을 건드려 결국 셋째 아들이 목을 매어 자결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말년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양녕대군. 왕위마저 져버린 희대의 로맨티스트(?)이자, 조선을 뒤흔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양녕대군 때문에 주위의 문지기, 내시 등 억울하게 태종의 노여움을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니며, 개중에는 곤장과 유배, 사형을 당한 자들까지 있었다.

이런 풍파를 일으키고도 양녕대군은 계속 골치 아픈 왕족으로 살아갔다. 충녕대군은 세종으로 즉위한 후에도 양녕대군을 형님으로 보살피지만 나중에 양녕대군은 세종대왕의 손자인 단종을 죽이는데 한몫을 하게 된다. 아마 쌓인 응어리가 많았던 모양이다. 야사(野史)에서는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세종)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일부러 미친 척을 하여 폐세자가 되고 보위를 양보했다고 하거나, 어리와의 사랑을 위해서 왕을 포기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사(正史)에서 언급하는 양녕대군의 언행을 보면 태종의 미움을 받고 폐세자 되기에 충분하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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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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