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문 형무소 1편
■ 서대문 형무소 1편
1905년, 일제는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그 후 일제는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한국인들은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을 벌이며 대항했다. 1906년 경무 고문이었던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한국 내 감옥의 수용능력 부족을 지적하면서 의병 등 반일세력을 탄압·수용할 목적으로 새로운 신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경성 감옥(현재 서대문 독립공원이자 옛날 서대문형무소)이다. 건물은 본래 아연판을 붙인 판자로 두른 허술한 형태였다. 건립비용은 약 5만원이었고, 규모는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 감방 및 부속건물 480평이었다.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四天王要馬)의 설계에 의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이 준공된 것이다. 수용능력은 500명 정도였는데, 이후 증·개축을 반복하여 1938년의 수용인원은 2,763명이었다.
이 감옥은 본래 1907년 8월에 완성되었으나,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의 의병 가담과 순종황제 등극 이후 시국의 불안정 등으로 인해 바로 개소되지 못했다가 1908년(순종 2년) 10월에야 비로소 개소하게 되었다. 감옥이 설립된 이후 초기에는 허위(許蔿, 1854∼1908),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이인영(李麟榮, 1867∼1909) 등 후기 의병 주도자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허위 등은 모두 경성감옥에서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일제는 1908년 경성감옥 이외에도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등 전국 7개 주요 지역에 감옥(監獄)을 세웠다.
1910년, 일제는 한·일 병탄조약을 강제로 맺어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고 식민지로 삼았다. 일제는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독립운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경성 감옥으로는 그 숫자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제는 서울 마포에 새로운 감옥을 지어 그곳을 ‘경성 감옥’ 이라 칭하고, 원래 서대문에 있던 경성 감옥은 서대문 감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고, 김좌진장군은 1911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2년 6개월 형을 받아 수감되었다. 이곳은 전국의 10년 이상이나 무기형(無期刑)을 언도 받은 기결수가 수감되어 있었던 점이 특색이었고, 여느 감옥과는 달리 18세 미만의 소녀수(少女囚)를 모두 수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 구금된 후 옥사하였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하여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되었다.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이곳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수감되면서 항일독립운동사의 수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되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