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대문 형무소 2편
■ 서대문 형무소 2편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재소자에 대해 정해진 작업, 정량의 식료품 배급, 교육과 운동에 대한 교정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에게는 형기(刑期)가 확정되기 전부터 온갖 취조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또한 옥사 내에는 겨울철에 난방이 되지 않아 동상을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동사(凍死)하는 일도 빈번했다. 여름철에는 각종 전염병으로 병사자가 속출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처우는 가혹하였다.
서대문 감옥이 서대문 형무소로 이름이 바뀐 것은 1923년이다. 이로부터 오늘날 일반인에게 익히 알려진 ‘서대문형무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현재 1930년에 작성된 「서대문형무소 배치도」가 남아 있다. 광복 이후 미군정 치하에서도 구치소, 교도소로 이용되다가,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주권을 가지게 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형무소로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름이 1945년 11월 21일 서울형무소로 바뀌었고, 이 시기에는 반민족행위자와 친일세력들이 대거 수용되었다. 김원봉, 김성숙도 수감된 적이 있으며, 여운형도 수감된 적이 있었다.
1950년대에는 수감자의 70퍼센트가 좌익인사들이었고, 정치·사회문제로 관련하여 간첩 및 사상범이 많이 투옥되었다. 근대화 과정에서는 특히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투옥되어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 때의 독립 운동뿐만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민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사의 여러 주요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투옥되거나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역사적 장소가 되었다.
해방 후 1946년에는 경성형무소로, 다시 1950년에는 서울형무소로 개칭되었다. 1961년 개정된 행형법(行刑法)에 따라 서울교도소가 되었으며, 1967년 7월 7일에는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다. 1987년 3월부터 서울특별시는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이곳 전체를 사적으로 지정,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조성했다. 같은 해 11월 15일 구치소의 시설과 인원이 의왕시로 이전한 이후, 모두 15개 동 가운데 5개 동과 중앙사, 나병사 등을 보존했다. 김구, 강우규, 유관순 등의 인물이 투옥되었던 제10·11·12사의 감옥 건물과 사형장이 1988년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고, 1988년부터 공원이 조성되기 시작해서 1992년 8월 15일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원했다. 1998년에는 체계적인 전시와 홍보를 위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개관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구성은 출입문 바로 앞으로 보이는 전시관, 바로 뒤로 중앙사, 그리고 그를 이어서 제9~12 옥사와 공작사, 한센 병사, 추모비, 사형장, 시구문, 격벽장, 여옥사(유관순 지하감옥), 취사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관 지하 고문실에는 밀랍인형으로 고문을 받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하여 당시 일본이 자행하던 고문의 잔혹함을 보여주는데, 여성 독립지사를 고문하는 장면에서는 처절한 고통의 비명까지 들린다. 한 사람이 서 있을 공간만 있어 2~3일 동안 갇혀있으면 전신마비가 온다는 고문실인 벽관도 재현해 놓았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