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불가난席不暇暖 - 앉은 자리가 따뜻할 겨를이 없다.
석불가난(席不暇暖) - 앉은 자리가 따뜻할 겨를이 없다.
자리 석(巾/7) 아닐 불(一/3) 틈 가(日/9) 따뜻할 난(日/9)
한 곳에 오래 앉아 있으면 체온에 자리가 따뜻해질 텐데 여기저기 옮기면 더워질 틈이 없다. 주소를 자주 바꾸거나 매우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에겐 편안한 자리가 언감생심이다. 한시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거나 진득하게 한 곳에 살지 못하고 휙 떠나는 사람들에 들어맞는 말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이런 방랑벽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諸子百家(제자백가) 사상가들이 자기의 학설을 전파하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집에 머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孔子(공자, 기원전 551년-479년)가 앉았던 돗자리는 따뜻해질 틈이 없고 墨子(묵자)의 집 굴뚝은 검어질 시간이 없다’ 고 후세 사람들이 표현했다. 後漢(후한)의 역사가 班固(반고)의 ‘答賓戱(답빈희)’라는 글에 소개됐다. 孔席墨突(공석묵돌)이나 墨突不黔(묵돌불검)이라 해도 같은 말이다. 묵자는 兼愛說(겸애설)을 주창한 사상가다. 黔은 검을 검.
이런 선인들의 일화 말고 직접 이 성어가 나온 곳은 南朝(남조) 宋(송)나라의 문학가 劉義慶(유의경)이 쓴 일화집 ‘世說新語(세설신어)’에서다. 옛날 漢(한)나라에 선비들의 우러름을 받는 陳仲擧(진중거)라는 곧은 선비가 있었다. 그가 豫章(예장)이란 곳의 태수로 좌천되어 갔을 때 먼저 관서보다 그 곳의 유명한 선비 徐孺子(서유자)를 만나 보려 했다. 비서가 관에 먼저 가야 한다며 말리자 진중거가 말했다. ‘옛날 周(주)나라 武王(무왕)은 폭군 紂王(주왕)을 멸한 뒤 商容(상용)을 찾아다니느라 자리가 따뜻해질 틈이 없었는데 내가 먼저 현자를 찾아뵙는 것이 어떻게 안 된다는 말인고?.’ 暖과 煖은 모두 따뜻할 난, 더울 난으로 같은 뜻이다.